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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를 잠시 떠나며 4



게이트가 열리고 탑승 절차가 시작되었다. 비행기를 빨리 탈 수 있는 자격이 있었고 심지어 좌석도 비행기 맨 뒤였으므로 


빨리 타는 것이 모두를 위해 이로울 수도 있지만 지금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제일 늦게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미련이 이런 상황을 두고 표현하는 단어 같았다.



 

어릴 적 가졌던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꼽자면 비행기를 타고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다시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거였다


시골 마을 촌놈에게 비행기는 대단한 사람이 타는 것인 줄만 알았고 제주도로 가는 첫 비행기에서 무척이나 설렜던 기억이 났다.



 

활주로를 돌아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가볍게 몸이 뒤로 쏠리는 얼마간의 불쾌한 느낌. 그리고 네팔 땅을 떠났다. 막상 이륙하고 


나니 네팔에 대한 걱정보다는 도착해서가 더 걱정이었다. 보통의 입국절차와는 많이 다를 테니까 조금은 긴장했던 것 같다


카트만두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열이 날까 봐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코로나 감염 여부를 떠나 열이 나면 비행기에 태워주지 


않는다고 했다. 해열제를 먹고 비행기를 타게 된다면 누군가를 속이게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지 열이 나서 


해열제를 먹었는데 이것이 남을 속이는 일이 되고 무척이나 무거운 나쁜 행동이 되는 것이다.



 

기내식을 두 그릇을 먹고 영화를 두 편이나 봤지만, 쉽사리 잠을 청하기 쉽지 않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는 8시간이지만 


카트만두에서 인천은 5시간 30분 정도면 도착한다. 더욱이 오후 다섯 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네팔시각으로 밤 열 시 반에 


인천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시차에 대한 걱정도 좀 덜했다.



 

한국에 착륙하고 서둘러 유심을 갈아 끼웠다. 세관신고서 외에도 검역을 위한 서류도 두 장 작성해야만 했다. 한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의외로 감정은 덤덤했다. 해결해야 할 남은 관문이 많았다. 검역을 위해 길게 줄을 섰는데 한국은 


새벽 두 시 반이었다. 빨리 나가도 교통편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나서 처음으로 착륙하고 서둘러 무빙워크를 타지 않는 


여유를 부렸다.



 

검역은 청바지를 입은 군인들이 하고 있었다. 카트만두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안내받았던 자가격리 보호 앱을 까는 법을 


알려줬고 체온을 측정했다. 한국에서 자가격리가 진행될 곳을 신고하고 전화번호도 확인했다.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소라면 누군가가 목소리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정도의 피곤함과 


번거로움이었지만 입국한 사람들은 양처럼 조용히 통제에 따랐다. 자동입국 심사도 대면심사로 변경되었다. 이분들은 죄가 


없다 되려 코로나를 가져왔을 수도 있는 수많은 잠재적 보균자들을 대하면서 직업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하니 검역과 


입국심사가 숙연해졌다.



 

게이트 밖으로 나왔지만, 방역복을 입은 안내원들이 광역버스를 대기하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새벽 네 시쯤 자리에 앉았는데 


네팔에서 온 일행들의 목적지가 다 달랐고 버스가 다 달랐다. 일행 중 첫차는 지방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광명역행 6시 


버스였고 막차는 경기 북부로 떠나는 내가 타야 하는 750분 버스였다. 그 와중에 대기실이 분주해졌고 미국에서 오는 


승객이 대기할 공간을 만든다고 했다. 확진자가 증가하는 미국에서 오는 두 대의 비행기라니 일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일행들에게 빨리 화장실에 다녀오고 이동을 최소한을 삼가자고 했다. 먼저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수녀님 짐을 차에 


실어드렸다. 내 버스가 왔는데 1터미널로 가는 길에서 잠들어서 의정부까지 한 번에 와버렸다.


 

의정부예술의 전당에 도착하니 경기 북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귀국 지원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두천은 


승합차였고 의정부와 양주는 미니버스였는데 포천시 버스는 운영 중인 노선버스를 방역 버스로 개조했다. 고향 포천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었는데 버스가 큰 걸 보고 또 이 큰 버스에 혼자 타고 가는 나를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코로나 


덕분에 노선버스 한 대를 전세 내서 택시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료로. 의정부 예술의전당 앞 꽃나무 이름은 모르겠는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2주가 지나면 꽃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건소에 들러 검사를 받으려고 했는데 


네팔에서 온 입국자는 증상이 있을 때만 검사를 한다고 했다. 기사님과 멀리 떨어져 함께 바람을 쐬고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도착해서 먼발치에서부터 반갑다고 짖어대며 꼬리 치는 개들을 봤지만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엄마는 집안 창문에서 


손만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코로나가 만들어준 신파 드라마가 되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집 옆 텃밭 비닐하우스에 텐트를 


쳐두셨다. 평소에도 손님이 오면 비닐하우스에서 많이들 놀다 가고 그랬으니까 가스레인지도 있고 싱크대도 있고 전기도 


잘 들어왔다. 한국은 네팔이 아니니까 정전이 되지 않는다. 감사할 따름이다.


 

짐을 풀고 찬물로 샤워했다. 샤워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 우리 집은 지하수였는데 코로나가 아니라 감기에 걸리지 싶었다


다행히 텐트 안에 전기장판이 있었고 작은 라디에이터도 있었다. 그래도 밤에는 영하였고 낮에는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비닐하우스가 그랬다.



 

비닐하우스에서의 일과는 카트만두보다는 덜 단조로웠다. 수녀님을 포함해서 주변 분들에게 귀국했다고 연락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봤다. 이틀에 한 번 하우스에 심은 감자와 시금치 상추와 부추, 꽃 화분에 물을 줬다. 하우스 옆 거위 


한 쌍이 있는데 알이 다섯 개나 있었다. 보일러실에 부화기를 설치했다 한 달이 지나면 부화가 될 텐데 내가 거위 알을 품는 


기분이 났다. 알에서 태어난 새 생명이 희망의 상징이 되길 바랐다.



 

설거지는 3일에 한 번 몰아서 하고 빨래는 몰아서 일주일 만에 손빨래했었는데 찬물에 손빨래하고 살짝 열이 났다 두 번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문품도 많이 도착했다. 포천시에서 보내는 비상식량과 농림식품부에서 보내준 채소 꾸러미 


그리고 주변 친구들과 선배들이 보내준 위문품들이었다. 직접 탕수육을 가져온 동네 형이 있었는데 먼발치에서 탕수육을 


내려두고 피식 웃고 그냥 갔다. 맨날 놀려먹던 대학 동기가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을 가득 사 와서는 웃으면서 발로 봉지를 


툭툭 치고 갔다. 소리치면 침방울이 튄다고 그랬다. 이런 희망과 배려들이 자가격리 동안 함께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감사했다.



 

가끔 보건소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 가끔 담당 공무원이 전화했다. 증상은 있는지 확인하는 안부 연락이었는데 배려해줘서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 공무원이 내가 발생시킨 쓰레기까지 걷어간다고 했다. 분리수거도 하지 말고 


음식물쓰레기마저 물기를 짜서 함께 담으라고 했다. 기다렸다가 음성이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양성이면 그때 


부탁드리겠다고 했다. 이 시국에 해외에서 온 것도 송구한데 쓰레기 수거까지 부탁할 염치는 없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일행들과도 많은 연락 했다. 자가격리가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 달랐다. 어느 지역에서는 보급품을 


과도하게 많이 줬고 어느 지역에서는 얻어먹는 처지에서도 민망한 수준의 보급품이 왔다. 얻어먹는 처지임에도 카톡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고 부럽기도 또 안도하기도 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도착해서만 검사를 했고 어느 지역에서는 도착과 


자가격리 종료 전에 검사했으며 포천은 자가격리 종료 전에만 검사했다.



 

격리되고 얼마 안 있어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역설적으로 재외국민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는 바람에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네팔에서 시행될 선거였고 선거 경비원으로 채용되어 나름 국가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네팔에서 선거는 시행되지 않았고 이를 이유로 한국에서 투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선거관리 위원회와 네팔 대사관에 문의했지만, 대답은 같았다. 선거가 가능하다고 해도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투표소까지의 


논길을 나는 걷고 담당 공무원은 뒤에서 차를 타고 따라올 생각을 하니 민폐가 따로 없었다. 조용한 시골 투표소에서 


자가격리자가 투표한다면 모두 얼마나 긴장할지 생각해보니 이번 참정권 행사는 모두를 위해 긍정적으로 단념하는 편이 


마음 건강에 이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황태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캠핑에 등한시했던 나를 반성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캠핑할 


일이 없겠다는 다짐도 했다. 밤과 아침에는 영하로 입김이 났고 낮에는 하우스의 열기로 땀이 났다. 미세먼지가 높은 날에는 


포카라가 너무 그리웠다. 포카라에서는 차 꽁무니만 따라가지 않으면 공기는 항상 맑았다. 특히 봉쇄되고 난 이후에는 훨씬 


더 공기가 맑았다.



 

격리를 마치고 무엇을 할지도 고민했다. 남은 기간 알바를 구할 수 있을까? 응시 가능한 자격증시험을 마무리 짓고 가는 편이 


좋을까? 낚시는 언제 어디로 가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면 얼마나 시원할까? 집근처 순댓국 집에서 


순댓국 한 그릇에 소주를 먹으면 대리운전비용이 얼마나 나올까? 그냥 생각해도 막연할 수 있는 질문에다가 코로나를 더하니 


고민의 끝이 더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자가격리가 해제된 지금 자가격리 동안 무엇을 했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전에 


집중해서 시험을 보고 시험지를 덮자마자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기분이다. 많은 분이 응원해주셨지만,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고 


어렵지 않았다. 가끔 네팔 소식을 들었고 네팔에서 산사태 사고 포터 한 분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내가 네팔에 


있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누군가 잘 마무리 해주는 것으로 믿고 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홍텔을 부탁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고였다. 나를 만나면 반갑다고 말도 안 통하면서 손을 잡고 한참을 말씀하시던 포카라


빈민가 엉클 미스테리(기술자)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함께 학교를 짓고 집을 두 채를 더 지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셨다.


포카라에서 마지막으로 상추를 나눠줄 때 손을 못 잡아 드린 게 마음에 걸렸다. 그때 손을 잡아 드렸더라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었을까?



 

한국에서 코로나대응을 잘한다고 뉴스로만 접하다가 실제로 코로나 방역에 해당자가 되어보니 한국에 대한 무한한 감정이 


차오른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부족함이 없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지향점이 분명했고, 상대평가로 


보면 A+가 분명했다. 그동안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환자와 사망자를 보면서 그리고 우리 정부에 대책을 


보면서 다시금 의료 종사자분들과 방역관계자분들에게 감사하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자가격리를 마쳤다. 결과는 음성이었고 수녀님을 포함해서 함께 온 모두가 음성이라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네팔을 떠나왔지만


분명히 네팔에 남아있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한국으로 온 이유로 코로나는 핑계가 될 수 있었다. ‘코로나 끝나고 보자라는 


말처럼 의례적이고 그렇고 그런 핑곗거리가 되기에 너무 쉬웠다.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정했다. 코로나가 음성이니까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개들과 집 마당을 산책했다. 내일부터 내가 보고 싶다고 지인들이 집으로 찾아오기로 했다. 낚시를 함께할지 


산나물을 따라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당장 내일 뭘 할지부터 정하지 못했다.




포카라를 잠시 떠나며 3


마지막 손님이 카트만두로 올라가고 열흘 정도를 더 포카라에서 보냈다. 상추배달은 조금 더 능숙해져서 봉쇄된 와중에도 포장 


손님을 상대로 영업하는 네팔 식당에도 가져다주었다. 엄브렐라 카페라고 여행객으로부터 중고장비를 기부받아 판매하고 얻은 


이익으로 지역사회 아이들을 먹인다고 포스팅을 읽은 기억이 났다. 상추가 도움이 된다면 이왕이면 남을 돕는 곳에 가져다주고 


싶었다. 여기에 상추를 주고도 남으면 레이크사이드 시내 마트 앞에서 무료로 나눠주었다. 오토바이에 실린 채소를 권할 때 


처음에는 안 산다고 하던 사람들도 무료라고 하면 좋아하면서 다들 하나둘씩 들고 갔다. 나에게 왜 상추를 무료로 나누어주냐고 


궁금해하는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내가 원래 상추를 키우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고 나눠주다가 나중에는 같은 말 


반복하기가 지쳐서 그냥 돈이 많아서 그런다고 했다. 나에게 한사코 돈을 주려고 했던 외국인이 있었는데 나 역시 한사코 


나는 부자라면서 돈 받기를 거부했다. 돈이 많아서 부자도 있지만 나는 마음 부자가 되고 싶었다.



 

상추와 채소를 배달하면 많은 분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되는데 사실 나는 크게 하는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포카라를 떠나기 전 마지막 수녀님의 전언과도 같은 말씀이 밭에서 나는 채소를 나누라였는데 나는 그저 말씀대로 


사는 것뿐이었다. 종교적인 이유 안에서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반드시 지키고 싶은 말씀이었고 잠시 포카라를 


떠나시는 포카라 해피홈 주식회사 회장님의 지시사항이기도 했다. 코로나로 떠나는 지금, 나도 수녀님도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고 최악의 상황에 어쩌면 유훈이 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했다. 해피홈 주식회사는 작년 여름 덥다고 모여서 냉면 


먹는 자리에서 나온 농담이었는데 농담도 자주 하다 보니까 무게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무한도전 무한상사여도 좋고 포카라 


해피홈 주식회사여도 좋았다. 나는 내심 영업부장 정도 생각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임원이 되었다.



 

42. 아침 열 시에 문을 여는 마트에서 꼭 살 것이 없었으면서도 마스크를 끼고 마트에 갔다. 마스크를 끼고 생필품을 사는 


다른 외국인을 보면서 포카라에 묶여있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좀 걷고 싶었다


평소에 걷기를 별로 안 좋아했는데 거리의 조용함 속에서 온전히 포카라를 느낄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콜라 한 캔을 사서 


호숫가로 돌아오는 와중에 43일 이후에는 외국인을 포함한 네팔 내부에서 이동이 전면 제한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에 


인사하고 지내던 대사관 영사님이었는데 이번 기회가 아마도 카트만두로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고도 했다


비행기 일정이 확정되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겠지만, 혹여 올라갔다가 카트만두에서 발이 묶이는 상황을 걱정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오토바이로 카트만두에 가는 방법과 다른 외국인들이 카트만두로 올라가는 방법에 대해서 수소문해봤지만 결국은 대사관 


협조가 필요했다. 대사관 직원은 죄가 없다. 공무원의 직업적 한계로 인해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해 확답을 섣불리 내려주기도 


어렵다. 저녁에 영사님과의 통화에서 전세기는 언제가 되어도 뜰 거라는 이야기와 카페에 달린 댓글들까지 영사님이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개인적인 걱정을 해줬다. 민원인과 주무관의 관계를 넘어 인간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대사관 직원은 죄가 없다. 누군가 피곤해야 한다면 내가 조금 더 피곤하면 세상은 보통 평화롭지 아니한가?



 

포카라에 거주하는 지인께 홍텔을 부탁하고 집결 장소인 바라히 사원 앞으로 갔다. 집결시간은 아침 8시였다. 걸어서라면 30분 


정도 걸리는 레이크사이드 초입이었는데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는 게 수월하지 않았다. 더구나 카트만두에서 먹어야 할 


비상식량도 어느 정도 챙겨가야 했다. 평소 연락하던 택시들에 연락했지만, 봉쇄를 모두 다 두려워했고 운행을 거부했다


길에서 만난 생수 배달 차량에도 부탁했는데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다고 했다. 주차해 두었던 상추배달 오


토바이를 다시 끌고 나와 캐리어를 나르고 도로 지인의 집에 오토바이를 가져다 두었다. 차들이 다니지 않는 레이크 사이드는 


낙엽이 쌓여가고 있었고 내린 비로 흙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오래전 보았던 좀비 드라마가 떠올랐다.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


인적의 왕래가 잦아드는 도시



 

버스가 출발하기 전 모든 탑승객의 체온을 재고 출발했다. 프랑스 일본 한국 캐나다 그리고 국적을 알지 모를 몇몇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로 출발했다. 평소에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거리에 차가 없어서 조금 일찍 도착하지 


싶었다. 배고플까 봐 달걀을 삶고 과자를 챙겼는데 아주 유용했던 것 같다. 가는 길에 두 번 쉬었는데 휴게소 한곳이 영업하고 


있었다. 달걀에 먹을 소금을 얻고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재미있었던 건 네팔에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


라는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카트만두로 가는 길은 봉쇄되었지만, 휴게소가 영업한다는 의미가 심장했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 체류에 도움을 주신 지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3층에 있는 집이었는데 캐리어를 


움직이는 소리가 나자마자 1층과 2층 주민들이 나와서 무슨 용무로 이곳에 온 것인지 물어봤다. 적대적인 감정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호의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비행기를 대기하고 있는 것이며 일주일이 안 걸릴 것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8시에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고 네팔 경찰 다섯 명이 와서 어제 주민들에게 했던 카트만두 체류 목적에 


대해 다시 설명해주어야 했다. 이동이 허가된 저녁 시간에 식료품을 구하고자 밖으로 나왔는데 포카라 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경찰들의 태도나 주민들의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조금 더 경직되어있고 외국인임에도 네팔인과 같은 강압적인 태도로 


대했다. 불쾌감을 느낀다거나 불편함을 느꼈다기보다는 코로나로 피곤해진 네팔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네팔은 봉쇄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으며 이 결정은 코로나로 걸리거나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양쪽 다 어려운 종착지인 갈림길에 


서게 된 것이다.



 

카트만두 골목에서 구매한 동네 버터는 엄청 맛있었고 어렵게 구한 삼겹살은 냄새가 나고 질겼다. 포카라에서 가져온 비상식량 


대부분을 먹었다. 카트만두에 있는 일주일 동안 걸어서 30분이 걸리는 마트에 용기 내어 간 적이 있었는데 주차장에 동그란 


원형을 일정 간격으로 그려두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요청했으며 1인당 장보는 시간도 20분으로 제한했다. 코로나로 이렇게 된 게 


너무 억울해서 비싼 코로나 맥주를 두 병이나 사서 마셨다.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은 이틀에 한 번 밖에 나가 물과 식료품을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드라마를 보고 


지치면 게임을 하고 게임을 하다 지치면 드라마를 봤다. 이것저것 관심 가지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개인의 취향에 스스로 


감사했다. 유튜브 동영상도 많이 봤는데 우연한 경우로 신천지 교주의 사주를 봐주는 클립을 봤고 역술에 대한 유튜브 채널이 


있는 것도 알았다. 순수한 호기심에 연락을 해봤는데 지금 예약금 10만 원을 내도 520일이 넘어서 전화 상담이 가능하다고 했다.


막연하고 어려울수록 미래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보고 이런 상황에 사주에 관심을 가진 나 역시 그 범주 안이라는 


것이 재미있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돈을 버는 직업이 간판 집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의 경우 역술인도 거기에 


해당하는 걸 새삼 깨닫는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집으로 가는 방역 버스를 물어봤다. 수녀님 역시 버스에 태워드려야 했으므로 절차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항에서 광역버스로 지역거점으로 이동한 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환승 해야 한다고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했고 나의 존재가 남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카트만두에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410일이 되었다. 대사관에서 운영하는 픽업 버스는 한 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고 큰길까지 


나와 있으라고 했다. 짐을 챙겨 큰길로 나가는데 역시나 경찰들이 길을 막아섰고 막아선 순간 경찰 뒤로 대사관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에 있는 대사관 현지직원이 상황설명을 해주고 버스에 탔다. 약속 시각보다 20분 정도 일찍 나가서 20분 일찍 버스가 


출발했는데 이후에 탑승하는 한국분들 모두 예상시간보다 일찍 나와 있어서 공항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모두 한국에 


빨리 가고픈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텅 빈 공항에서 대한항공, 한국 사람들을 위한 탑승 절차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낚시가방은 보안검색에서 걸렸고 가방을 


열어 낚싯대를 보여주고 얼마짜리 낚싯대 인지까지 설명해주었다. 수화물로 낚시가방을 부칠 때 다시 설명해주어야만 했고 


마지막 보안검사를 할 때 또 설명해주어야만 했다. 한국에 낚시꾼들에게 유명한 주석으로 된 총알 추가 꼭 탄두 모양이었다


천천히 가방을 열어 설명해주면 된다. 비행기는 늦게 탄다고 자리가 없거나 서서 가지 않는다.



 

세관을 지나 출국 절차를 마치고 수녀님과 먼저 올라온 호텔 마지막 손님을 만났다.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비행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두 시 반쯤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고 비행기는 아직 미얀마를 지나는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공항에서라도 기념품을 


좀 샀었어야 하는 건데 그냥 온 게 못내 아쉽다. 비행기 착륙 30분 전쯤에 마지막 보안검사를 마치고 게이트 앞에서 기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길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포카라를 잠시 떠나며 2


떠나기로 결정하는 와중에도 복잡한 마음과 별개로 몸 역시 준비로 가볍지 않았다. 한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는 323일 


대한항공이었고 그 이후 네팔 봉쇄의 서막이 올랐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봉쇄, 지역 간 이동과 모든 상점의 영업이 중단되었다


다행히 오랜 개도국 생활에서 오는 경험으로 소금 설탕을 비롯한 생필품을 비축해 두었고 라면과 쌀을 비축했다. 오토바이로 


카트만두에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기름도 적당량 비축해 두었다.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봉쇄된 네팔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할 거리였다. 비디오게임기는 최신형 모델이었고 


임 씨디는 한팔에 감지못할 한아름이었으며 외장하드에 담겨진 보지못한 드라마는 몇천 기가바이트가 되었다. 누군가 


인생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소중한 것을 낭비할 때 온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나는 누구보다 완벽히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상추를 납품해서 밥을 먹이던 빈민가 급식소도 운영을 중단했다. 평소에도 외국인이 네팔 빈민을 데리고 밥을 먹이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활동의 눈치 같은 것이 존재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체가 불법이 되어버렸다. 급하게 쌀을 


주문하고 고기를 주문해서 봉쇄를 버텨보자면서 집마다 분배해주었다.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네팔 정부에서 


예고한 2주간의 봉쇄가 공표한 시간에 끝날지 코로나가 네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가 


포카라 빈민가에 오게 된다면 기저 질환자나 노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큰 위협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문득 쥬스기계를 


구매하면서 네팔의사로부터 들었던 면역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면역이 중요하고 대단한 키워드임에는 분명했으나 끼니를 


못 채우고 제때 밥을먹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코로나를 이길만큼의 면역이 생길지는 누가봐도 고개를 가로 저을일이 분명했다



 

봉쇄 첫날 길거리에서는 차와 오토바이가 사라졌고 조용한 적막만이 거리를 감쌌다 거리를 걷는 외국인이나 네팔사람들이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정해진 시간에만 식료품과 의약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이동이 가능했다. 오토바이로 채 1분이 걸리지않는 


시내 마트에 십분을 더 걸어가서 먹을 것을 더 구매했다. 비축해놓은 것은 어디까지나 비상식이었으므로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여행자의 성지 포카라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저 높은 산위에 마차푸차레는 마치 무슨일이 


있느냐는 듯 맑은날씨에 당당한 위용을 뽐냈고 산란철을 맞은 페와호 물고기들은 퍽퍽 수면위를 뛰어올라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만들어냈다.



 

정말 마지막 손님이 카트만두로 상경하는 버스에 탑승하기로 했다. 대사관에서 준비하는 한국인 전용버스로 암묵적으로 


대사관에서는 모두 버스에 탑승해 주기를 요청했고 수녀님역시 카트만두로 상경하시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오는 손님 


하나 하나가 기억에 남지만 이 손님은 동생같고 후배같은 손님이었다. 산을 좋아했고 데우랄리에 올라가는데 하루 반나절이 


안걸릴정도로 체력이 좋았으며 지난겨울 데우랄리에서 눈사태 사고가났을 때 사고현장에서 구조 일손을 도왔던 청년이었다


떠나는 사람을 잡을수도, 그렇다고 같이 발걸음을 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사관에서 조사하는 전세기 탑승신청은 했지만 


언제 전세기가 출발할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카트만두로 올라가게 된다면 카트만두 숙소에서 한발짝을 움직일수가 


없는 가택연금에 놓이게 되는것이었다. 그러다가 만약 전세기 운항이 안되기라도 한다면 포카라로 돌아올수도 없이 꼼작없이 


카트만두에 발이 묶이는 오리알이 되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불안해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한국에서는 전세기 운용을 시도 한다는것이었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 그리고 자국으로 대피하는 


전세기를 운용하는 국가는 미국 호주 프랑스 독일 중국이 전부였으며 이어서 한국이 그 자리를 이어갔다. 독일대사관에서는 


EU의 대장으로 유럽국가의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지고있으면 모두 다 비행기에 태워주었다. 영주권제도가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영주권자들도 귀국을 시켜주었는데 호주에서 3년 가까이 살았는데 영주권 취득을 안한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아쉬운 감정을 


가지게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직 전세기가 계획중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비행기 요금이 비싸다고 포카라에 


체류하기로 결정한 외국인 여행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것이었다. 숙박업소 업주입장에서도 음식과 장기투숙을 하는 손님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며 남기로 결정한 여행객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에 비해 포카라의 체류비는 너무나도 저렴했다


무엇보다 고국으로 돌아가도 봉쇄고 남아도 봉쇄라면 네팔에서 봉쇄가 더욱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떠나는 수녀님을 위해 도시락을 쌌다. 저장식품으로 얼려두었던 떡갈비를 꺼내어 굽고 김치를 볶았다. 당뇨에 걸린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경하는 카트만두 가는 길에 혈당이 떨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수녀님과 마지막 손님 그리고 카트만두로 


올라가는 한국인들을 위해 생수 두박스를 버스에 실었다. 가는길에 휴게소가 영업을 하는지 미지수였고 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도움을 주고싶었다 몇주전 미리 귀국한 코이카 단원에게 넘겨받은 물이 좋은데 쓰였다 남을 위한 발걸음은 이렇게도 


여운이 깊고 짙다.



 

나도 떠날 준비를 해야하는데 상추밭이 걱정이었다. 가진게 없을때는 걱정거리가 없는데 가진게 많아서 걱정거리가 늘어난다


청상추는 씨앗을 맺는 절정으로 향해갔고 고수는 거의 끝물이었으며 열무와 쑥갓은 조금더 자라면 먹기 딱 좋을만큼 자랐다 


포카라에 남은 한인들을 위해 야채를 배달하기로 결심했다. 전날 저녁 카카오톡으로 신청을 받고 이른아침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봉쇄였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식료품이 없으면 경찰한테 최악의 경우 회초리로 맞을수도 있었다. 그런데 탁트인 그리고 


차없는 길을 달리는게 너무나도 좋았다. 첫 번째 검문소를 샛길로 돌아서 야채를 싣고 눈사태 가족이 머무는 호텔, 집에 계시는 


한인 목사님,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야채를 배달했다. 네팔에서 쌓은 연륜은 경찰이 없는 샛길을 너무도 잘 알았고 혹여 경찰이 


붙잡더라도 어눌한 네팔어로 야채를 호텔에 배달하지않으면 나는 큰일난다정도는 할수있었다 어눌한 네팔어와 마스크


후즐그레한 복장, 오토바이에 가득 실린 야채들은 통행증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너무나도 귀찮은 존재가 분명한 것 같았다.



 

야채를 파종할 때 수녀님을 강하게 말렸었다 코로나로 네팔도 중국처럼 봉쇄가 될수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자라난 상추를 


어떻게 하실거냐고 말리는 조로 말씀을 드렸는데 결국 수녀님을 말릴수는 없었다 파종의 계절이 왔는데 씨앗을 들고 빈땅을 


바라봐야만 하는 농부의 심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않다.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입듯 계절이 오면 


농부의 땅은 응당 씨앗을 품어야만 했다



 

빈민가에도 상추와 고수를 배달했다 원래는 이걸 팔아서 쌀을 사다줘야되는데 그냥 상추를 줄 수밖에 없었다. 네팔사람들은 


상추를 생으로 먹지않고 볶아먹는다 그래서 상추를 많이 줘야한다. 빈민가에 상추를 나눠주는날에도 치사하게 날씨는 맑았고 


안나푸르나 산군들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빈민가 사람들도 봉쇄에 오토바이를 타고다니는 나를 걱정해주었다. 경찰하고 


싸우지말라고 당부했고 또 길에 차가없다고 너무 빨리 달리지 말라고했다. 보편적 네팔 문화와 달리 만나면 반갑다고 두손을 


잡고 말도 안통하면서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는 아저씨에게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땀을 닦아주는 부녀회장 아줌마도 문앞에 


상추를 두고 눈인사로 전달할뿐이다. 이들이 위험해서 그러는것보다 시내 마트에서 장을본 내가 위험해서 그랬다. 인간이 


인간의 존재만으로 걱정거리가 되다니



 

네팔인사는 두손을 합장하고 나마스떼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악수를 청하는 네팔사람은 보통영어를 잘하거나 해외에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네팔의 인사습관 하나가 걱정거리를 조금 덜어준다는 생각을 해봤다. 신체 접촉없이 


상대의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는 어쩌면 코로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사가 아니겠는가?



 

아이샤 밥을주고 내 밥을챙겨먹고 식료품을 살 수 있는 시간에 식료품을 사고 돌아오는길은 호숫가로 돌아왔다. 봉쇄된지 


몇일 되지도 않았는데 페와호로 들어가는 하수구의 물이 맑아졌고 물고기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거나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거의 일을 순차적으로 돌이켜보지는 않았지만 순서없는 단편들로 회상해보고 


바둑에 복기를 하듯 기억을 곱씹었다. 그때의 나는 어떠했는가?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적어도 코로나로 어두워진 


앞날을 예측하는 것 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느끼는 감정들이 새로웠다. 일상에서 하는 명상 같기도 난봉꾼의 회개 같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시간은 잘 갔다. 봉쇄된 포카라에서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너무도 막연했고 또 우울한 감정에 빠지기 쉬웠다.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던 와중에 산이 너무 예뻐 잠시 세우고 사진을찍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니까 돌아가야하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산아래 상추오토바이가 언제 다시 이길을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아예 안돌아올수도, 생각보다 빨리 


돌아올수도 있다 욕심을 내려두는 것이 쉽지는 않은데 내려둘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것이


 대책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순간은 대책없어 보이지않는다 평화로울뿐이다.




포카라를 잠시 떠나며 1 네팔

 

포카라에 홍텔이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고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입소문은 찾아왔고


블로그와 여행기에 등장하는 "홍텔"이라는 글자에 감사하고 행복한 날들이 분명했다. 매주 성당에 가고 상추를 키워 배달했다


페와호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낮잠을 자고 설산으로 오토바이를 끌고 히말라야 산바람으로 콧바람을 채워 넣었다


집에 찾아와준 길거리 강아지 아이샤가 덩치가 많이 커져서 이제 어른 개가 되었다



 

네팔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또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순응" 이나 "섭리" 같은 물 흐르는 삶에 대해서 


하루하루가 감사한 하루였다. 일요일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미사를 하면 오후 네 시 반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나는 햇살이 


주일을 잊지 않고 찾아온 나에게 주시는 신의 광채이기도 또 나의 삶에 축복인 것 같기도 했었다.



 

네팔에 찾아오시는 분들은 간혹 방송을 보고 또 입소문으로 꼭 우리 집에 묵지 않아도 여행용 가방 한가득 헌 옷을 가져다준다


학용품도 많았고 드물게 힘내라면서 소주도 몇 병 들어있었다. 오토바이 한가득 헌 옷을 싣고 제로 킬로미터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는 설산으로 향하는 그 넓은 길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사무치게 그립다



 

처음 코로나가 발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론이 늘 해오던 과대포장인 것만 같았고 사스나 


메르스가 그러하였듯 시간이 지나면 그 혼돈이 쉽게 가라앉고 금방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것만 같았다 포카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인 업체 사우지(사장)들끼리 한 잔씩 기울이는 저녁 자리에서도 코로나는 큰 안줏거리는 아니었으며 아쉽지만


이번 봄 장사는 어렵게 되었으니 비수기 여름을 잘 대비해서 가을을 준비하자는 중론 같은 게 있었다. 중국에서의 확진자가 


늘어나고 이어서 한국에서 확진자가 늘어남에 따라 23월 예약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취소이기에 


다음 기회에 꼭 만나길 바란다는 기약 없는 말로 그렇게 예약취소를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사업주로서도 코로나가 큰 문제지만 여행자로서도 코로나는 큰 문제였다. 세계여행이라는 약방에서 감초였던 포카라에 묶인 


여행객들 역시 이후 행보에 대해서 고민하고 결심해야만 했다. 한국으로의 귀국, 인도를 포함한 주변국으로 이동, 이집트로의 


이동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인생에서의 모든 선택이 이후에 일어날 미지수에 대한 예측이라지만 특히 코로나가 온 이후에 


선택은 이전과 달리 더욱더 깊은 고민을 요구했다. 어쩌면 목숨이 달린 선택이 될수도 있었다.



 

포카라에 묶인, 정확히 다음 행보를 고민하는 손님들을 데리고 성당 상추밭에 가서 돌을 고르고 고랑을 만들었다


대학교 봉사팀이 와서 함께 토대를 이룬 상추밭이었고 이후 오기로 한 고등학교 봉사단이 코로나를 이유로 오지 못하게 되었다 


밭의 수준이 텃밭의 수준은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민하는 손님들을 데리고 매일 밭일을 하거나 


손님들을 위해 밥을 해줬다. 어차피 큰돈 벌자고 포카라에 사는 것이 아니기도 했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정도 도움은 


게스트하우스 사우지(사장)로의 도의적인 책임 같은 것이라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남을 돕는 선의 아래 익숙지 않은 


밭일을 즐기는 서울 출신 여행객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네팔 정부에서는 여행객들에게 많은 신호를 줬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코로나가 유행한 8개국 대상으로 입국할 때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요구했고 그러다가 도착비자 발급을 중단했으며 전 국가 대상으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한국어로는 


봉쇄인 락다운(Lock-down)을 시작하기까지 첫 신호로부터 채 3주가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손님 중의 하나였던 세계여행 커플이 봉쇄 직전에 한국으로 떠났고 드디어 네팔에도 봉쇄가 찾아왔다.

 

우리가 네팔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정도로 네팔은 한국과 다르다. 히말라야에는 장엄한 설산이 펼쳐지지만 


산 아래 사람들은 장엄할 정도로 높은 만큼이나 깊게 가난하고 궁핍하다. 의료시스템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네팔에는 또 


포카라 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봉쇄 직전 중고 주스기계를 사러 간 자리에서 판매자는 WHO 지역 사무소 의사였고 주스기계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이 나는 포카라 그리고 네팔 대책에 관해 물었으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는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가 왔다. 그는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는 면역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다고 했다.



 

나 역시 판단의 기로가 왔음이 분명했다 정확히 판단의 갈림길에 몰리게 되었다. 2년 전 갑상샘암 수술 이후 매일 약을 먹어야 


했는데 남은 약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인생사 새옹지마 그마저도 작년 9월 오진으로 한국에 가서 검사를 받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달 치 약을 미리 더 받아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네팔 병원에 연락해서 호르몬제를 문의하고 구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에게 갑상샘암은 질병이 아니었다. 애초에 갑상샘을 제거하는 경우가 손에 꼽는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약을 먹지 않으면 얼마 만에 죽는지 검색도 해보고 두 알 먹던 약을 하루에 한 알로 줄여서 기간을 늘려볼까 고민도 


해보았다 한국에 가지 않고 포카라에서 버티는 카드들의 대안들이 하나같이 나에겐 너무 치명적인 것들뿐이다. 한국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결정했다.



 

귀국을 결정하고 가장 큰 걱정은 소리내어 말하지 않을 주변의 시선이었다 네팔에 와서 빈민가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내면서 


또 그만큼 가까이 지낸다고 했으면서 코로나로 네팔이 어려워지니까 네팔을 바로 떠나게 되는 이방인의 태생적 한계에 상황이 


너무나도 맞게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포카라에 일곱 개의 한인업체 중에 귀국을 결정한 것은 나와 수녀님 둘뿐이었다


고령자와 기저 질환자라는 사유가 비겁해 보일까 두려웠다. 커다란 덩치에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큰 목소리로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코로나가 오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 소리내어 말하는 평판보다 스스로 비겁자가 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쓰렸다.



 

암수술 경력자로서 나는 1년에 한번 추적검사를 해야 했고 무엇보다 약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줄어드는 약통을 보면서 


아침마다 피가 말리는 순간을 겪었다. 수녀님 역시 오랜 지병으로 병원에 가는걸 더 이상 미루기가 어려운 순간이 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서 오는 안부 연락이 남아야 한다는 저울에 남은 깃털 같던 추마저 날려버렸다. 매일같이 한국에서는 


확진자를 발표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뉴스로 내보내고 있었고 밥은 잘먹느냐는 엄마의 일상적인 안부 뒤에 담긴 무게를 


더 이상 무겁게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귀국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와야만 하는 시점에 귀국을 결정한 것이다.


 

비겁자의 첫 번째 기록 2020.4.22

 

 


포카라 상추 라이더 (Feat 상추배달 알바구함) 네팔




안녕하세요 포카라 홍텔입니다 

저는 네팔 포카라에서 살면서 상추농사를 짓는 사람 혹은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 정도 되겠습니다 

요즘 봉쇄(락다운) 걸려서 인도네팔 아주 아주 아주 정신이 없구요 저역시 한국행 특별기를 탑승하기위해 

카트만두로 와있습니다 (대사관에서 들어가라고 했어요!)


참고로 락다운이뭐냐면 길에 아무도 못다니게 하는 그런겁니다...한국이 새삼 선진국인걸 느끼고있습니다 

뉴스보면 나오는데요 네팔 인도에서는 경찰들이 길목 길목 지키고있다가 방망이로 빠따를 친다거나 기합을 줍니다 

외국인은 오늘(4월3일)까지 카트만두로 무조건 올라와야 했어요 

내일부터는 외국인도 빠따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포카라 성당입니다 네팔 제2도시 포카라에 하나밖에 없는 성당이구요 성당이 좀 이쁜건 일본 건축가가 3년동안 직접

손수 지어서 기부하고 갔습니다 오른쪽으로 잘보면 온상이 있구요 왼편에 성모상은 최근에 만든건데 전 돈을 두번내서

이름이 두번들어가있습니다 (농담아님 자랑아님 심지어 대리석)











원래 이 상추밭 부지는 정글이었습니다 건물을 지으려다가 어그러져서 정글로 남았던 땅이었어요

그런데 놀리기 아까워가지고 트레킹 오신 한국분들 + 대학교 봉사단+ 장기체류하면서 심심했던분 + 코로나로 발목이 

묶인분 모두 모두 꼬셔서  여기오게 한다음 돌을 줍고 밭을 일구었습니다 

밭에는 청상추 적상추 쑥갓 실파 고수 열무 청경채 를 심어서 키우고있고 호박은 원래 코로나 없으면 심을려고했는데

이제 언제 심을지 기약이 없네요 ....

원래 이 야채들은 포카라에있는 한국식당에 납품을 해서 돈을 만들고 그돈으로 빈민가 아이들 밥을 먹이는데 

사용되었어요 네팔사람들은 놀랍게도 상추를 볶아먹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라고 적고 천하에 쳐죽일 XX)가 오는바람에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았고 상추는 자라는데 빈민들은

먹을게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경찰이 골목다가 빠따를 후두려 치는바람에 함부로 배달을 할수도 

없었어요 코로나에 걸려죽나 아니면  굶어죽나 고르라고 하면 누구나 코로나에 걸려죽는걸 택할거라고 생각합니다 

배고픔은 무엇보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요 고민끝에 큰맘먹고 오도바이 시동걸었습니다 












포카라 공항근처 빈민가에 상추 배달을 왔습니다 해피홈(어린이 보육시설) 매니저인 어제이 군이 상추를 분배하고

있습니다










상추를 받고 좋아하는 동네 할매와 아이들...아 쌀을줘야되는데... 상추를 줘가지고 맴이 많이 아프네요

상추는 볶으면 양이 확 줄어요...










포카라는 봉쇄되었기때문에 감금된 외국인들에게도  싱싱한 상추를 무료로 나누어줍니다 

잠시 포카라를 떠나신 수녀님의 뜻이 "가능한 많이 나누라" 였기 때문입니다 

아! 드디어 로얄 엔필드가 등장했군요!! 오토바이까페에서 의도치 않은 밀땅을 했습니다 












사회필수인력으로 구분되는 경비원이나 마트 점원분들에게도 상추를 나누어줍니다 한 삼일정도 오토바이타면

경찰들 어디서 모여있는지 알고 몇시에 모이는지 대충 각이 옵니다 중요한건 랜덤으로 순찰도는 기동순찰팀을 

잘 피해야 됩니다











상추배달가다가 문득 "아 내가 이렇게 멋진곳에서 매일매일 라이딩을 하고있구나" 하면서 감탄할때가 하루이틀이 

아닙니다 16년식 로얄엔필드 중고로 구매했습니다만 서남아시아(인도 네팔 스리랑카외)에서 로얄엔필드는 

할리데이비슨 급이고 여기에 상추를 배달하는것은..마치 한국에서 할리데이비슨에 배추나 무를 배달하는.....

저도 원래 상추장사 잘되면 스쿠터 하나사서 알바쓸라고 했던 원대한 꿈이 있었드랬습니다 


세상이 슬픈만큼 자연이 아름다워 지고있는것같아요 공존할순 없는걸까요















원래 납품으로 상추주고 돈받아야되는데 무료로 막퍼줍니다 수녀님의 뜻입니다 

가게와 주거지가 따로인분들은 집으로 찾아가서 신선한 야채를 배달해 드립니다 

아직 지난겨울 눈사태 가족들도 포카라에 있고 남아있기로 결정한 한국분들이 많아요 


이렇게 하루에 잔잔바리로 시내바리 달리면 50키로정도 달리는것 같습니다 

가다서다 반복해서 연비 증말꽝이에요 세상에 누가 엔필드에 캐리어달아서 상추를 배달하겠습니까 대체












오늘자 포카라 시내입니다 포카라를 떠나오면서 가장 힘들었던건 언제 돌아오지 모른다는 부표같은...











원래 오토바이도 아는형한테 보관을 부탁했는데 택시가 운행안해서 아침부터  캐리어 하나하나를 오토바이에 

싣고 달렸습니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스로틀을 끝까지 땡기면 참 시원합니다 

치우지않은 낙엽과 진흙은 좀 을씨년 스럽기도 하구요


상추는 이제 16년식 엔필드350 트윈스파크 모델에서 12년식 싱글스파크 모델로 바톤터치합니다  

(근데 오토바이에  캐리어 없다고 배달은 제걸로 한대요..그리고 제꺼 트윈스파크이긴한데 두번째 플러그는 기름탱크

들고 갈아야되서 정비소 아저씨가 귀찮다고 그냥 줄을 짤라버렸어요)


언제다시 돌아갈수있을까요?

2종소형있으신분들 포카라 오시면 상추배달이나 좀 하고가세요 (의외로 재미있음)



여러분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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