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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에서온 카톡 네팔



네팔 수녀님에게서 카톡이왔다

70넘은 고령의 수녀님은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분명히 지금의 포카라를 자랑하고 싶어하심이 분명했다

더듬 더듬....카톡울리는 소리 띄엄..띄엄 사진올라오는 소리

사진 몇장과 지금 수강 신청자가 50명이상이 몰렸다는 말씀... 잘하고있으니 걱정말라는 말씀 

 


포카라를 떠나며 사진속 칠판에 신명기 성경구절을 적어두고왔었다 " 두려워 하지말라" 

이곳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자립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빈민가 소녀들은 신나게 재봉틀을 밟고있다고 했다

문득 노찾사가 부른 사계 노래가 생각났다


빨간꽃 노란꽃 꽃밭가득 피어도...

설산 아래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고통이 아니라 희망일 것이기 때문에 기분이 새롭다





내가 지은 학교는 기숙학교다 

학대받는 여자들이 학교에서 머무르며 숙식을 해결하고 기술을 배워 자립하게 만드는 목표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난 그 설립취지에 맞추어 학교를 만들었다


사실 이 학교를 지을때 주변에 모든분들이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기존 시설을 감당하기 버거운데 이런 기숙학교라는 추가적인 시설물이 과연 효과적으로 운영될수있을것인가에 대한

지극히 합리적이도 타당한 의심이었을거다... 이해하고 인정한다


포카라 프리티비촉 빈민들과 함께하시는 왕수녀님은 지극한 나이에 온화한 미소뒤로 "전진해야할때는 전진하는"

리더의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다 남들이 망설일때 나라는 물이 들어왔을때 노를 저을줄 아는 진정한 리더

왕수녀님... 


노가다는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며 닭발 엄청 볶아주시던 우리 수녀님

남은 닭발 챙겨서 밤에 소주랑 먹으면 그렇게 달았다



만들때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재봉틀 돌아가고 학생들이 기술배우면 그걸로 된거다



주방도 만들고 가스렌지도 놨는데 현찰이 살짝 부족한 관계로 급식을 못해주고 있다고 아쉬워 하셨다

빈민가 학교와 파란십자가 아래 수녀님의 모습이 애잔하다 

낮은곳에 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일이라는것을 가본사람만 안다






정성스레 심은 포도나무는 아직 잎사귀가 영글지 못했고

수녀님이 심으신 무가 새순이 올라왔다고했다

이곳에서 재봉틀 밟는 아이들의 희망같은 새순 말이다





행복하다 

타인의 인생에 점찍는 삶이 이래서 재밌다

4월에 무먹으러 네팔 가야하나 싶다

 

우간다 난민캠프 -키리얀동고 우간다





일때문에 얼마전 난민캠프를 다녀왔다 그리고 몇일전 우리나라 포탈사이트 대문에 걸려있는 우간다 난민캠프에 대한 글을 읽었다

외국 논객이 쓴 글을 그대로 받아 옮길수밖에없는 난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안타깝기도하고 또 한글로도 충분히 

난민캠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수있다는 아프리카에 살고있는 알지못할 자부심(?)으로 오랫만에 블로그를 적어보기로 했다



우리가 익숙한 난민에 대한 이미지는 중동 특히 시리아쪽에 치우쳐져있다 오랜내전으로 삶의터전을 잃고 유럽으로 이동하는

난민들에게 국제사회는 많은 관심과 지원을 보내고 있으며 이들의 절박한 사정과는 별개로 또 그들만의 속사정이 존재한다

유럽은 난민을 인도적차원에서 수용하는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하고있지만 국민들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며 이 난민

문제로 인하여 촉발되는 문제들은 난민과 거주민의 문제를 떠나 기존 거주민끼리의 이념대립으로 번지기도 한다 

여기에 IS문제 추가하고 더불어서 테러가 빵빵 터지면서 모든 문제의 소용돌이는 시작되는것이다 이로하여 유럽사람들은 

난민들이 이주하는 자체에 대해 불편한속내를 가지고있다


우간다 필드에서 만나는 비서구권 원조기구 사람들은 난민을 백인들이 자초한 "업보"같은것으로 생각한다 

서구권 큰형님들의 식민지 였던 (그리고 만만했던) 나라들에 대한 오랜 수탈과 내정 간섭들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산출물이 바로 난민이며 이것은 고스란히 무중구(우간다에서 백인을 지칭하는말)들이 작금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이유인것이다

(북한을 위에두고 사는 우리도 결국은 고민해봐야할 숙제같은걸로 느껴진다)


톡깨놓고 유럽사람들은 난민이 유럽본토에 거주하는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국경밖에서 머물기를 바라고 

외부의 일을 알아서 해주길 바란다 강경화된 신자유주의노선 때문이라고 설명해도 좋고 트럼프의 당선으로 노골화된

인종문제라고 생각해도좋다 호주가 보트피플에 기름과 식량넣고 그대로 바다에서 돌려보낸지 몇년됐고 미국은 이미 있는 

비합법 체류자들도 내보내고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자국민보호로 부른다 



인터넷에서 시리아 난민에 대한 비참한 사진과 영상을 많이 접할수있다 파도에 휩쓸려죽은 아이의 사진.. 폭격의 먼지로 덮힌

아이들... 들것에 실려가는 아이들.... 그러나 이걸 다시생각해본다면 누군가 그 상황을 찍을수있는 '기회'라는것이 존재했다는

것이고 그 기회에서 핸드폰이든 카메라든 촬영을 위한 도구가 함께했고 심지어 그것을 인터넷에 올려 국제사회의 공감을 

얻어내는 통로마저 존재했음을 알수있다 


시리아 사람들은 잘살다가 그야말로 망가져서(?) 난민이된경우이며, 급격한 국가의 붕괴가 국제적인 관심사가된것인지 

난민들이 유럽으로 와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관심사가된것인지는 난민을 이해하는데 중요하지않다 시리아 난민보다 

우간다에 몇배 되는 난민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오늘도 새로운 삶의 터전을 향하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원래 못살던 

아프리카 사람들이기때문에 어디에 살아도 크게 문제될것은 없을것이다' 라는 뭣도 없으면서 있어보이는 사람으로서 

막던지는 그 논제가 결국은 맞아 들어가는것은 아닌지 사람으로서.. 사람으로서... 사람으로서...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원래 불편했으니까 계속 불편하던지 말던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야만하는, 너희들의 사정이라고 말하기에는 근현대까지 

아프리카에서 수탈해가던 자원이 셀수도 없으며 이러한 수탈을 배경으로 서구권 사람들의 현재의 기반이 이루어진걸

우리는 모두 교과서로는 배웠는데 현실에서는 잊고 산다 


우간다에 난민은 크게 두종류로 나뉜다

일반난민들은 원 소속나라에서도 하층민 출신으로 내전으로 삶의터전을 잃고 도보 혹은 차량을

이용하여 캠프로 입소하는 난민을 일컫는말이고 주로 내전중인 남수단 및 콩고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맨발에 진흙묻는 그런 난민


반면 도시난민은 난민자격 취득 절차 자체가 다르다 캄팔라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난민심사소에가면 난민 자격을 취득하기위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있는데 이들의 국적은 아프리카 전역으로 다양하다 무엇보다 일반난민과 다른점은 이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다점이고 우간다에 체류허가를 받게되면 캄팔라에 집을 사서 보통의 우간다 시민이 되어 거주하게되는것이다 

<사진1 유엔난민기구 2017 아프리카 지원금-2017UNHCR>

자료에서 보듯 난민문제는 비단 우간다뿐아니라 아프리카 전체가 '섞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하층민 전쟁난민의경우

인접국으로, 상류층의 정치난민의경우 본인이 판단하기에 안전한 아프리카 전역을 상대로 난민절차가 이루어지고있는것이다 


원래가 다민족 다부족 국가인 우간다사람들은 난민을 인식하는데 유럽거주민들과는 다른시각이 존재한다

백인과 고소득 기독교로 대표되는 기존 유럽거주민들이 흑인 저소득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기존난민에 강한거부감을 가지고있다면

우간다는 원래 60개 이상의 부족이 연합으로 구성된 다부족 국가이며 국가간 경계선 설정역시 부족간의 실제 영향력보다는

국가 지도부의 정치적인 이유로 설정됨에 따라 한부족이 두개 혹은 세개의 국가에 걸쳐 거주하고있기도하다 

따라서 우간다라는 국가적인 통일성보다는 부족이 우선시되고 가족과 부족외 다른 사람들을 인식하는 기준자체가 그냥

'다른부족' 사람들이 되어버리는것이다 


우리는 국가가 국민들의 뜻과 위배되고 헌법과 다른방향으로 국정운영이 전개된다면 탄핵같은 안전장치를 통해 

국민다수의 뜻대로 바로잡는 민주주의의 순기능이 유지되고있다 그러나 우간다는 어떠한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은 이제 그야말로 고어같은, 이시대에 부적합한 속담이 되어버렸는데 이 문장이 주는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개도국 난민문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될수있다고 생각한다

집단과 조직의 문제를 개인들의 희생으로 유지시킬수있을것인지, 혹은 개인들이 힘을모아 집단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해나갈수있는지는 전적으로 구성원의 역량에 달려있는것이며 우리는 중들이 모여 절을 중들의 뜻대로 바꾸었는반면

지금도 수많은 아프리카의 중들은 절을 떠나고있는것이다  


여기에 더불어 아프리카 사람들이 대부분 겪은, 독재자의 강압아래 이루어진 수많은 제노사이드를 기반으로 아프리카에 살면

누구나 한번쯤 겪게되는(?) 이주의 고통이 보다 보편화되어있는것으로 인식한다 우간다도 이전정권에서 난민이 많이 발생했었고

그때 많이 이주했었으며 또 지금은 다른사람들이 우간다에와서 살고있는.... 아프리카 시민으로서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기분마저 든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우간다에 위치한 8개의 난민캠프중 캄팔라에서 세시간거리에 위치한 키리얀동고 난민캠프에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키리얀동고 난민캠프 베이스캠프 정문 유엔과 엔지오, 경찰서들이 컴파운드를 이루고있다>


키리얀동고 난민캠프는 식민지말 영국식민정부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케냐 소요사태 난민을 이주 시킨데에서 이 캠프의

역사는 출발한다 이후 이디아민 시절에는 이 난민을 활용한 독재자의 개인농장으로 활용되었으며 90년대 발발된 남수단내전과

콩고내전으로 발생한 난민들이 우간다에 유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케냐에서 발발한 정치관련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난민을 위한 캠프로 본격가동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있다 


<베이스 캠프에서 1학교로 이동중, 도보로 이동가능하며 경작지를 볼수있다>


난민들은 8명 혹은 세가정이 하나의 셀(Cell)을 이룬다 이러한 셀은 난민촌의 기초구성단위로 셀단위로 약 100평의 식량 자립을

위한 경작지를 제공받으며 식량배급도 이루어진다  키리얀동고 난민캠프의 공식이름은 Kiryandongo Refugee Settlement로

정확히 말하면 난민의 정착을 위한 마을이며 우간다 정부의 큰 목표역시 난민들을 우간다에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국가구성원으로

만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있지만 아직 국가의 역량이 아직 이 뜻에 미치지 못하고있다 


난민촌 경찰의 경우 일반 우간다 경찰보다 엄격한 기준과 잣대로 외부인을 대하고있다 우간다 정부는 난민을 활용하여 

외부세력이 우간다 내정에 간섭하는것을 우려하는 동시에 난민을 통해 국제사회의 원조를 이끌어내야하는 민감한 입장

때문으로 판단한다





 수용인구 5만5천명의 이 난민촌은 총 다섯개의 초등학교, 두개의 중학교가 존재하는데 매우 높은 출산율을 기반으로

학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1번학교의경우 국제  NGO인 세이브더 칠드런이 관리하는 학교로 천막교실 두개 

나무교실하나 화장실과 매우 넓은 운동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교사는 9명 학생수는 400여명으로 양질의 교육환경을 기대하기는 힘들며 학생들은 콩고 공용어인 아랍어와 우간다 공용어인

영어로 수업을 받는다 




출신국가별로 손들기를 했는데 케냐출신 아이가 손을들었다 피부색은 비슷할지라도 자세히보면 골격과 생김새가

제각기 천차만별임을 알수있다 아이들은 타이어굴리기를 하고놀거나 놀이터에서 놀이기구를 타고노는데 학교에오는 

가장 큰이유는 포리지라고 불리우는 옥수수죽을 한그릇 먹을수 있기때문이다


TPO라는 국제 NGO에서 관리하는 2번학교는 교실하나로 구성되어 세개의 반이 한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고있다 

벽화는 영국 워차일드NGO에서 작업한 그림인데 3일만에 다 그렸다고했다 선진국 벽화봉사 퀄리티의 수준을 실감한다 



수업중에 꼬마아이가 계속우는게 마음에 걸려서 왜우는지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뜻밖에도 배가 고프다는 이유였다

캠프에서는 1인당 한달에 12KG의 곡물을 지원받고 1셀당 4리터의 미국산 옥수수 식용유를 배급받는다 

방문한날이 한달에 한번있는 배급일이었는데 아이는 몇일전부터 집에 식량이 떨어져서 굶고있다고 했다 

가방에 있는 초코바를 꺼내주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고 다음에 누군가 방문하게되면 다같이 눈물흘리면서 방문자를 

맞이하게될 걱정이 컸다 

떠나는 발길이 이렇게나 무겁다 





난민촌에는 의료시설에 총 세곳 존재하는데 제일큰 병원과 두개의 진료소로 구성되어있다 인구 5만5천외에도 인근지역 

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방문하기때문에 실제 내방인원은 훨씬 더 큰것으로 파악한다 

방문한 3번 진료소는 담당구역이 1만천명으로 구성되어있는데 매일 여섯명정도의 신생아가 이병원에서 태어난다 

산모들을위한 포리지는 매주 수요일 특별 배급을 실시하며 이때 정기적인 에이즈검사를 실시하여 에이즈산모를 별도 

관리하고있다


한국에서 두줄이 생기면 양성반응을 보이는 테스트기라고 하면 주로 임신테스트기를 생각하는데 이건 에이즈 테스트기다

난민촌 공식 에이즈 보균율은 약 7프로정도이나 비공식을 합산하면 약 30퍼센트 이상이 될것으로 추정하고있다 


두줄생기면 양성반응인 임신외에도 말라리아 에이즈등 개도국에 사는 사람의 운명처럼 의도치않은 순간에 실시하게되는

검사가 존재한다 검사기에 두줄이 주는 의미가 '내안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맥락으로 이해가가능한데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아니라 말라리아 에이즈라면 두줄이 주는 의미는 사뭇 다르다




난민촌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한 IT센터. 영국에서 지원해준 컴퓨터는 윈도우8이 무난하게 돌아가고있으며

난민촌 청소년들은 이곳에서 오피스를 위주로한 사무자동화 교육을 받는다 우간다에 그렇게 귀하다는 케이블 인터넷이

이곳 난민촌에 들어와있으며 40대의 컴퓨터가 외부전기 사정과는 무관하게 태양열 발전으로 작동한다 

난민촌에서 유일하게 현대화(?) 되어있는 부분. 인터넷이 무제한+무료라는 우간다에서도 굉장히 드문 곳으로 

방문했을때 대다수의 아이들은 인터넷 동영상을 시청하고있었다



방문한날이 한달에 한번있는 식량 배급일이었다 식량배급은 UNHCR이 관장하지않고 WFP가 관장하는데 최근 곡물부족으로

1인당 12kg에서 6kg으로 배급량을 줄이고 6kg의 곡물에 해당하는 지원금을 받는다 지원금은 7000우간다 실링으로

약 2달러가 되지않는다 한사람이 한달에 배급받는 식량이 한달에 6kg 그리고 미화2불 최저 생계비에 대한 기준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WPF산하 사마리아인 이라는 NGO가 캠프 식량배급을 담당하고있는데 캠프 공식 방문허가를 받은 우리의 방문에 조금은 

배타적이었다 다행히 우리 현지직원이 과거 WPF에서 3년간 일한 경험으로 한국에서도 매우 익숙한 "너 누구 알아?" 를 

시전했는데 한번에 "어 알아" 가 나와서 무난하게 식량 및 지원금 배급과정을 확인할수있었다 


배급소 앞에서는 배급일에 맞추어 열리는 시장이 있었는데 배급받은 식용유를 이용해 바로 튀겨낸 감자튀김이 맛있어보였다

튀김은 역시 기름이랄까 캘리포니아산 옥수수기름으로 갓튀겨낸 감자튀김을 먹고싶었으나 '너 그거먹으면 큰일난다'는

현지직원의 만류로 가까스로 참아냈다 



초등학교와 중등학교가 섞여있는 3학교. 교실이 없어서 야외수업을 하고있다 수업내용은 미국역사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US에이드가 지원하는 정착촌에 부합하는 교육내용이지 싶었다 정착촌학교중에 가장 교실이 많은 학교였지만 

재학생수도 제일 많았다 초등학생은 4천명 중학생은 700명 수준이다 인근 카톨릭 재단에서 관리하는 학교로 

정착촌에 있는 두개의 중학교중에 하나다 

야외수업중인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중에 몇명이나 여학생들이 공부를 하고있는지 물었는데 의외로(?) 절반정도의

학생이 여학생이었다 정착촌에서는 외모로 성별을 구별하는것도 쉽지않음을 느낀다 


기관장과의 면담에서 기관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고있는 부분에대하여 질의하였는데 당연히 교실부족이 가장 큰문제일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대답은 뜻밖에 먹을 식량이 없다였다 




세계식량계획에서 우간다에 식량을 지원할때는 엔테베-캄팔라 도로에 위치한 메인 창고로 식량을 수집하고 우간다에 위치한

8개 난민캠프로 식량을 배분한다 다시 캠프는 베이스캠프내 위치한 창고와 별도의 창고에서 난민들에게 배급할 식량을 구분하여

보관한다 식량은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문제로 SGA라는 팻말은 사설 경호회사가 경비를 하고있다는 증표다 

우간다는 사설경비회사도 실탄을 가지고 경비업무에 종사한다 

WFP근무했던 현지직원의 말로는 식량보급의 단계가 존재한다고 했다 치안이 불한할경우 헬기 및 수송기를 이용한 공중투하

이후 무장 경호병력을 이용한 트레일러단위 배급. 정착촌이 안정되면 창고를 건립하고 창고단위 운영이라고했다 

브룬디에서 총격이 오고가는 와중에 식량배급을 해본경험이 있는 우리 현지직원은 꽤나 덤덤히 식량 배급에 대해 알려줬다




1번병원. 캠프내 가장큰 병원이고 가장 많은 3만명이상의 난민을 담당하지만 엑스레이 기계조차 구비되어있지않다 

그와중에 심장병,산부인과,일반진료,혈액검사로 구역이 나뉘어져있는데 상태는 열악하기 그지없다 

하루에 열명정도의 신생아가 이병원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건물 벽마다 콘돔이 놓여있었는데 어느회사에서 만들었는지는 알수없었다 다만 보급품이니까 좋은 제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






난민캠프는 UNHCR 관리에 이루어지고 키리얀동고 캠프는 덴마크 난민위원회가 슈퍼바이징 파트너로 관리하고있다 

그러나 외부자원 투입관련문제는 우간다 총리실 난민부에서 전부를 관리하고있으며 기타 분야별 구역별 NGO협의체가 구성되어 

난민들을 관리하고 감독한다  


정착촌을 돌다가 문득 난민캠프에서 에비앙으로 샤워를 했다는 외국 여배우의 일화가 떠올랐다

모병제 국가에서 군생활을 개판으로 한사람을 욕해야 할지 군대를 선택하지않은 사람을 욕해야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와서 가장크게 느끼는것은 인권이다 

스리랑카 네팔등 아시아 개도국과는 또다른 별개의 느낌을 받는다

아시아 개도국은 아무리 빈민이라도 '사람' 이라는 전제하에 빈민이었는데

아프리카 빈민은 특히 난민촌 빈민은 그동안 봐왔던 빈민들중에 단연 최고라고 할수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것은 과연 어떤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흙탕물 웅덩이에 고인 빗물을 동물처럼 엎드려 마시는 현지인 아이에게 내가 가진 캐논 카메라로 사진을찍는것이 

난민 포르노가 되는게 중요한것일지

아니면 아프리카는 원래 그래라면서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상대성이 이런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부분인지는 많이 

그리고 치열하게 고민해봐야할 일인것같다



아프리카는 1열 그리고 전선이 맞다 세계의 NGO들이 모여있고 구호단체들이 여기에 다모여있다 

그동안 아시아에 머물며 나도 전투를 하고있었다는 감정이 죄의식이 들만큼 이곳은 치열하다 


우리단원들은 다음주에 3번병원에 난민산모 출산을 돕기위해 파견된다 아무도 안해본걸 하려니까 난이도가 좀 있었고

개도국에서 뇌물없는 파견허가를 얻기위해 수많은 스트레스를 겪었지만 허가는 승인되었고 이제서야 무언가를 할수있는

기회를 얻었다 탈없이 잘 다녀오기를 기도한다



사람이다... 아프리카 사람도 사람이고 아시아 사람도.... 서양사람도 사람이다

우리가 비빔밥을 비비며 군침을 돌듯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되는 세상

감칠맛 나는 참기름 같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캄팔라생활 20170727 우간다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는 이야기에대하여


스리랑카에서 삼년을 살았는데 돌아보건데 시간참 빨리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히 앉아 담배를 피우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를 고민해봤다

지나간 시간이라서, 다시못올 아쉬움에 시간이 빨리흘렀던 것인지 

한살 한살 올라가는 나이만큼 시간이 빨리 흘렀던것인지는 분명하지않으나 

시간에 대해서 날씨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수도있었다는 생각을 해봤다 


한국에 살면 계절별로 옷장을 한번씩 털어내거나 야금야금 옷하나둘씩을 바꾸면서 전체적인 옷장 물갈이(?)를 

하게되는데 맨날 여름인 스리랑카에서는 계절이 변하는 인식을 이 옷장으로 못했다

매일 입는옷이 정해져있고 그게 일년이되고 이년이 되고 삼년이 되었다 

날씨가 매일더우니까 '오늘은 비가 오나 안오나' 이정도 개념이었지 시간의 흐름을 정확시 인식할 계기가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오학년때로 기억한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선에서 지금을 어느 계절로 불러야하는지 애매했던 그순간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고 돌아오는길에 젖은몸에 스치는 바람이 굉장히 차가웠다

그래서 그날부터 가을로 하기로 스스로정했던 기억이 난다 


우간다에서 시간이 벌써 두달을 바라보고있다 우간다날씨는 매우 좋다  날씨가 엄청좋았다고 기억되는 퍼스나 

브리즈번보다 훨씬좋다 밤에는 19도 한낮에도 25도수준이고 이게 놀랍게도 연평균기온에 수렴한다

에어컨을 아예 안트는것은 아닌데 꼭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프리카에 있고 적도가 지나가는데도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쾌적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옷장에 옷또한 바뀔일이 없다 매일 비슷한 옷을입고있으며 입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문득 우간다에서의 시간이 빨리지나갈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런데 이 시간이라는 관념에 대해서 요새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있다

런닝머신위에서 5분도 뛰어보고 10분도 뛰어보고 15분도 뛰어본다

빠른속도로 달리면 누구나 숨이차고 힘들게 마련인데 5분이.... 10분이 그렇게 고통스러울수가 없다

나는 스리랑카에서 그리고 우간다에서 굉장히 편했던것은 아니었을까 고민해보다가도....


4월 한달 하루도 못쉰 네팔에서의 고된 일정은 또 나에게 어떤 시간의 의미였는지 깊게 생각해보는 밤

캄팔라생활 20170725 스리랑카


스리랑카에 있을때 수도인 콜롬보에서 임지인 암파라로 돌아갈때 보통 여덟시간 정도가 걸렸다 

스리랑카 제2도시인 캔디까지 보통 두시간 반정도 그리고 핸드폰도 잘안터지는 굽이굽이 산길을 

한시간 반정도 가게되면 마치 스리랑카의 동쪽이 한번에 다보일것만 같은 절경이 펼쳐지는데 

볼것없는 스리랑카에서 이게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잠들기 어려운 그 버스안에서도 여럽사리 잠을청하다가 고개가 좌우로 흔들리며 차벽을 치게되면 

처음에는 자리를 고쳐잡으며 얼만큼 왔나 꼭 눈을떠서 밖을 확인했는데 시간이 지나 스리랑카에 

익숙해지고 나면 꼭 눈을뜨지 않아도 잠결에 얼마나 왔는지 위치를 생각해보고는 다시 잠드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슬프지 않다


18. 꼭 열여덟번의 굽이고 코너다 아래에서 위로 급하게 올라가는 승강도로이기때문에 경사는 거칠고 

한시간을 달려도 지도에서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이동인 미미하기 그지없다 한굽이 한굽이를 돌때마다 

수도로 간다는 기대감으로 올라가는 고도만큼 기분이 들뜰때도 있었고 한굽이 한굽이 내려갈때마다 다시 

현장에서 아이들과 복작대야 한다는.. 낮아지는 고도만큼이나 공기가 무거워지는 때도 있었다


이길이 어떻게보면 참 예쁘다 잠시 차를세워 넓게 트인 동쪽을 보고있으면 저멀리 엄마가 있고 아빠가있고....

다시 네시간을 달리면 임지인 암파라가 있었으며 그리고 내옆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뭐 얻어거리는거 없나' 

하면서 나를 주시하고있는데 3년을 살면서 이곳을 수도없이 지났을텐데도 사진한장을 남기지 않았다


그게 지금 후회가 된다 '지금' 아니면 할수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원때는 '앞으로도 수없이 지나갈 길이다' 

라면서 사진을 안찍었고 코디할때는 '언젠가 한번은찍겠지' 라는 막연함으로 그리고 익숙해진 피곤함으로 

잠들어버림으로서 그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론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사진을찍는데는 크게 어렵지않다 스리랑카에가서 다시 그곳을 찾기만 

하면 되기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진에 대해 미련이 남는것은 정확히 사진을 찍을수있었던, 오랫동안 기억될수

있었던 그때의 '시간'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스리랑카에 살면서 제이슨 무라즈노래를 엄청들었다 호주에서 쓰던 고물 3G핸드폰에 제이슨 무라즈노래를 

넣어서 어디를 이동할때 낚시할때 꾸준히 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제이슨 무라즈 노래는 스리랑카를 생각나게 

하고 그 가사 역시 '너는 언제나 집에 돌아올수있다'는 타향에서 고독의 시간을 보내는 봉사자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말이었기때문에 ...


열여덟굽이 승강타... 그때도 제이슨 무라즈 노래와 함께 하는경우가 대부분이 이었다 주말을 콜롬보에서 보내고

월요일 평일, 화요일 부터 다시 공휴일인 수업을 제끼기 참 매력적인 그때도 나는 일요일밤에 내려가서 월요일 

수업을하고 다시 올라와서 술을 마셨다 처음에 장거리버스는 구토가 올라오는 거부감이었는데 나중에는 사색을 

하고 생각을 깊게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던것 같다 책을 읽어보려고도 했는데 잘 안오는 멀미가 오게되어 

닌텐도DS 고스돕이 그자리를 대체하는 시간도 많았다


시간이 흘러 아프리카에 있다 스리랑카에서 한국은 6천키로 

우간다에서 한국은 만키로가 넘는다 

물론 지구에서 달까지는 9천3백만 마일이 넘는다

나는 언제고 집으로 돌아갈수있다


캄팔라생활 20170726 우간다

3년전 4월입니다


열대의 섬나라에서... 아직은 낮선 열대의 그나라에 적응하고 있었을때 현지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나름 그나라에서 무언가 도움을 주겠다고 간것인데 말도 안되는 모국의 사건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어찌된 영문을 

물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하고 ....

때로는 분에 넘치는 지적과 간섭에 '너희는 그만한 크기에 배한척도 없으면서 왜그러냐'는말이 목구멍까지 왔다가 

내려가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참았던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아프리카에 있습니다 생각보다 덥지않고 생각보다 합리적인 사람들에 적응하면서

 잘지내고있습니다 3년전 4월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던것과 비슷하게 현지인들은 작년 이곳을 방문하셨던 

우리나라 전 대통령님의 안부를 많이 묻습니다

나라의 대통령이 탄핵되고 감옥에 간일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없습니다만 3년전 그때와 

달리 덤덤히 말할수있어서 3년전 4월의 부끄러움이 다른 한편으로 치유되는것 같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국민들은 언제나 헌법에 보장된 자유와 정의를 확고하게 믿으면서 산다.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와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킨다면 그것이 설령 대통령일지라도 예외는 있을 수 없다 .

우리는 총이나 칼을 들고 혁명을 하지않았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작은 양초를 들고 거리로 나아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을뿐이다"


탄핵은 분명히 우리나라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수있다면 또 그렇게 부끄럽지만은 않은일 같습니다. 

어디 우리처럼 살기가 쉽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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