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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리움만 남았다 한국


퇴원하는 마지막 날도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지를 먹고 피검사를 한 다음 


이른 아침 외래에 다녀왔다. 무난한 퇴원의견. 모두가 긴장한다는 퇴원 후 첫 외진은 일주일쯤 뒤인 23일로 잡혔다 


이때 조직검사 결과를 통한 암 확진과 중증환자 등록을 해준다고 했다. 어차피 떨어진 갑상선인데 이제부터 정신을 


바로차려 보험처리라도 확실히 해야지 싶었다.


 

대학병원은 퇴원하는 데에도 절차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점심시간을 넘길지도 모른다고 했다


퇴원도 몇 군데 부서조율이 필요한 것 같았는데 열시 반쯤 간호사가 와서 퇴원해도 좋다고 가서 수납하면 된다고 


안내해줬다. 아침밥을 먹을 때 퇴원을 축하한다는 병원장 문구가 간단히 적힌 인쇄된 카드와 잘게 자른 몇 가지 과일을 


컵에 담아 퇴원 축하식으로 줬다 이렇게 퇴원은 축하받아야 마땅한 일임에도 큰 감흥이 없다. 집인 포천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를 두고 엄마와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밖에는 비가 왔다.


 

퇴원 후 집에서의 생활은 별다를 게 없다 나이에 맞지 않게 모았던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가벼운 집안일을 


했다 갑상선이 없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수술 전과 똑같이 살 수 있을 것 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지만 


이런 건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마음한구석 박스에 담아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수술 후 


입맛을 순간 잃었는데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었다가 감당 안될 만큼 불어날 체중이 걱정되기도 했고 수술 후에 잘 먹지 


못해서 회복이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입맛은 삼일정도 뒤에 돌아왔다


단지 갑상선 수술을 마쳤다는 우울한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 이라고 생각한다.


 

첫 외진을 가기 전에 보험회사와 준비해야할 서류에 대해서 매듭지어야만 했고 단지 그뿐이었다 집에서 정말 


마음 편히 게임하면서 책 읽으면서 외진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첫 외진을 맞이했다.


 

서울까지 차를 끌고 갈까 하다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탔다. 2호선 전동차, 조금은 붐비는 그 전동차 안에서 


이제 장애인 노약자 석에 얼마간은 앉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귀여운 생각을 해봤다 신당역을 지날 때 전만큼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막연하지 않는다. 덤덤해지는 내가 조금은 대견스럽다. 6호선 안암역에 가본사람은 알 텐데 


꽤나 역 바닥이 깊은 곳이다 심지어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살면서 처음으로 


노약자용 승강기를 타봤다 함께 타신 분들이 눈치를 주면 어떡하나 잠시 고민했었는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나의 존재란 세상에서 그런 것 이었다.


 

외진은 너무나도 무난했다 수술은 잘되었고 전이도 없었고 앞으로 수술을 집도한 이비인후과 의사와는 외진을 


실시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앞으로 나는 내분비 내과 환자가 되는 거였다. 수술한 양쪽 모두 암이라는 진단서 


한 장과 중증환자 등록하시라고 서류 한 장을 줬고 간호사가 밖에서 보험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다시 한 번 정리해줬다.


그리고는 갑상선 수치를 관리하는 다른 교수님에게 진료를 했는데 예후가 좋아 동위원소 치료는 불필요 하다고 했다


다만 갑상선 수치가 낮아 복용할 신지 용량을 늘렸고 다음달 14일에 혈액검사를 21일에 수치에 따른 외진을 하기 로 


했다. 친구 졸업식이 19일 토론토에서 있어서 쉬는 김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물 건너갔다


쉬는 동안 토론토 낚시를 검색하면서 힘을 냈는데 아쉽게 되었다.


 

수납을 하면서 중증등록을 하고 진료비를 환급받은 다음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받는데 칼슘약이랑 신지로이드 


한 뭉텅이가 천 백 원이었다. 약국 수납창구에서 중증 등록 한 거 맞으시냐고 물었는데 마침 그 순간 문자로 


한정특례 선정 문자가 왔는데 기분이 묘했다 병원비를 그리고 약값을 적게 내면 감사해야 하는데 꼭 감사한 


마음이 안 드는 그런 기분 


감사했는데 감사하지가 않았다.



백수의 진단서에는 얼마간의 근로능력이 제한되는지 얼마간의 병가가 요구되는지 적혀있지 않고 적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무척이나 심플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찬찬히 다시 읽어봤는데 얼마간의 근로능력 제한이 명시되지 않는 


진단서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 의사와 내가 서로 번거롭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과 내가 사회로 돌아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더욱 막연해지는 것 같아서 더 막연해진다는 생각을 해봤다


 

집에서의 일상은 무료하다 아침을 먹고 쉬다가 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쉬다가 책을 보거나 낚시를 갔다 가평으로 


철원으로 임진강으로 낚시를 다녔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물고기에 대해서 마치 물고기가 인생의 꿈이라도 되는 


양 물고기를 잡아야만 되는 사람처럼 물고기를 쫒아 다녔다 잡지 못하게 되니까 더 잡고 싶어졌고 못 잡을 때의 


아쉬움이 더 커졌다 그나마 다행인건 물고기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물어보고 조언을 구할 사람이 주위에 너무나도 


많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실수를 하고 또 그 실수를 고치고 그러면서 커가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내 인생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외진 후 며칠 뒤 친척 동생의 결혼식이 서울 남쪽에서 있었는데 장거리 운전으로 다녀왔고 운전한 다음날 크기가 


커져버린 거위의 집을 만든다고 무리를 했더니 저녁을 먹을 때 목구멍이 죄어드는 느낌이 났다 목 넘김도 굉장히 


불편한 기분이었다. 급하게 동네 큰 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자신이 없다고 수술한 병원에 가라고 했다 


한밤중에 고대병원 응급실에 갔지만 기도가 약간 부었을 뿐 특별한 응급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퇴원 후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빼면 큰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목운동에 대해 방심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연락 오는 지인들에게 일일이 병과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대해 피로를 느꼈고 SNS에 수술 후에 


찍은 셀카를 올림으로서 나의 수술 사실을 한 번에 그리고 만방에 알렸다. 수많은 위로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더 막연함을 줄때도 있었다. ‘언제 낫느냐? 언제 정상(사회)으로 돌아오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진단서에도 


없고 의사도 언급 한 적이 없으므로 나도 대답하기 어려웠다. 인터넷에 누구는 한 달을 쉬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두 달을 쉬었다고도 했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 바라보는 흉터는 그냥 절개를 했고 봉합을 한 외과 환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갑상선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흉터가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면 내가 다시금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수술 후 보름쯤 뒤에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이별의 이유를 찾거나 묻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관계가 


의미하는 것과 결별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관계 안에 누군가 더 이상 전처럼 사랑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것이 나이던 상대이던 잡는다고 잡아지는 것도 아니고 미련에 엉엉 운다고 돌아선 마음이 돌아서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로서 갑상선 암을 통해 실직과 이별의 3관왕을 한 번에 해낸 사람이 되었다 암에 걸린 30대 백수는 내가 


생각해도 매력적인 이성이 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한 친구는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일이 없다며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고 위로했고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말들을 해줬지만 


거울 속 목 언저리에 난 상처를 보고 깨닫는다. 역시 나이를 먹으니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쉬는 김에 확실히 쉬고 무언가 성취한다는 성취의 기쁨을 만나기 위해 모터보트 운전면허랑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손에 쥘 수 있다는 대형운전면허를 공부하고 있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과 별개로 당장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마음가짐으로 몇 개의 자격증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어제는 대전에서 포천 집까지 스리랑카에서 잠시 함께한 


형이 병문안을 와줬는데 까미노 순례길에 대해서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주위 인연을 정리하는 법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고 갔다. 이렇게 내가 어려운데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사람과 같이, 그리고 오래 함께 같은 길을 


갈 필요가 없는 것 이었다. 인생의 울타리가 이렇게 줄어들지만 울타리 안이 더욱 견고해지는 계기가 되라는 충고가 


가슴에 와 닿았다.



제주도에 광어도 잡으러 가고 싶고 블라디보스톡에 러시아 게도 먹으러 가고 싶다 네팔 안나푸르나도 다시 가고싶고 


까미노 순례길도 가고 싶어졌다. 30대 백수 암환자지만 주머니에 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는게 정말 별게 없는데 스스로 뭔가 아는 양 나름 부지런히 살아왔던 그동안의 시간이 참 재미있다

 

아직은 추억을 되돌리면서 사는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서 일까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추억을 발판으로 더 재미있는 인생을 위해서 좋은 친구들과 함께.......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는 거고,


만원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어야 십 만원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는 거다.

 

다시금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 행복하시길!

 

자 나도 여러분도 모두 건투를 빈다. 인생이 뭐 있던가. 모쪼록 암과의 인연은 이생에 여기까지이길 빈다.

 


지금, 그리움만 남았다 한국


병원에서의 셋째 날 아침, 나를 깨운 건 피 뽑으러 온 간호사의 달콤하지 못한 모닝콜이었다. 피를 뽑는 게 아프다고 


하지만 환자가 잠결이고 뽑으시는 분이 기술적으로 잘 뽑으면 금방 다시 잠들 수 있을 만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스리랑카에 있을 때 앓았던 뎅기열을 통해서 몸소 체득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팔을 내어 드렸는데 불행하게도 


이날 아침 내 팔뚝의 혈관들은 나도 간호사도 도와주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한지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간호사는 


진땀을 흘리면서 당황했고 나는 그런 간호사를 위로했다. 채혈용 바늘 다섯 개 정도를 손등과 팔뚝 여기저기를 찔러서 


겨우 내 피를 가져갔다 무슨 연유로 피검사를 하는지 별도로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공부한(?) 바로는 혈관 내 


갑상선 수치와 칼슘 수치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다행히 입술이 떨리거나 하지 않는걸 보니 부갑상선 


들이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칼슘 약은 평생 안 먹어도 되겠다.’라는 감사한 아침이었다


사람은 이렇게 당연한 걸 잃어봐야 사소한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 같다.


 

바로 이어 공복에 먹으라고 내 인생 첫 신지로이드가 나왔다. 수술 후 다음날 아침에 느낀 감정은 이미 떨어져버린 


갑상선에 대한 불필요한 미련을 지우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작고 노란 그 녀석을 만지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작은 녀석과 앞으로 평생 함께 해야 한다는 기분이 묘하다 평생 함께는 결혼식에서나 쓸 수 있는 말 


인줄 알았는데 일체의 프러포즈 같은 것도 없이 나는 지금 왼손에 신지를 오른손에 물 컵을 쥐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핸드폰으로 인생 첫 신지를 사진으로 남길까 하다가 얼핏 서글플 수도 있는 순간에 이런 재미난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웃겨서 신지대신 내 셀카를 찍었다


갑상선 전 절제 환자 누구나 그렇듯 매일 먹는 신지로이드가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알로 줄어든 다거나 혹은 한 달에 


한 알로 줄어든 다거나 혹은 갑상선을 대체할 인공 갑상선이 개발되는 상상을 해봤을 줄로 안다. 미래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니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신지를 매일 먹는 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했지만 그 작은 


알약하나가 넘어가는 첫 목 넘김이 그렇게 묵직할 수가 없다 첫 신지는 그렇게 쿵하고 가슴에 와 닿았다


 

수술 후에는 스트레스가 없을 줄 알았는데 배액관이 스트레스였다. 아침에 신지를 나눠준 간호사는 운이 없으면 


배액관을 매달고 퇴원 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집이 포천인 나는 이 주머니를 매달고 집까지 가는 길과, 주머니들을 


달고 이루어질 집에서의 생활, 또 돌아오는 그 길이 머릿속에 단번에 상상이 되었기에, 하루정도 더 입원을 하더라도 


배액관을 꼭 빼고 집에 가고 싶었다고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그런 것은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침 일곱 시 반쯤 수술 후 첫 진료를 갔다. 병상으로 외진을 올 줄 알았는데 내가 내려갔다. 수액팩 이랑 


항생제 팩을 머리위로 매달고 가슴팍에 보무도 당당하게 배액관 두 개 매달고 외진을 가는데 엘리베이터 앞 거울에서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났다. 씻지도 못해서 퀭한 얼굴에 영락없는 환자 한명이 거울 속에 있었는데 꾀죄죄한 모습이 


웃기기도 참 웃겼다


 

*병원에서 가만히 보면 소변 줄 하고 배액관은 보통 내놓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대변을 모으는 주머니는 보통 


몸 안에 가리고 다니는 것 같다


 

첫 진료는 별게 없었다. 교수도 아니고 처음 보는 의사였는데 의국에서 연륜이 좀 되는 듯 나이가 좀 있어보였다


허리를 앞쪽으로 숙인 다음 고개를 세우고 쭉 내민 혓바닥을 의사가 거즈로 꽉 잡은 다음 목구멍으로 내시경을 넣은 


채로 간단한 소리를 내어 성대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너무도 간단하게 성대가 살아 있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지만 혓바닥을 너무 세게 잡아서 혀가 아팠다. 조심스럽게 배액관이 어떻게 될지를 물었는데 액이 나오는 


양을 보아하니 왼쪽은 오늘 저녁쯤 오른쪽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의사는 나에게 


병실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지만 나는 젊은 의사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마지막 궁금증이 있었다.


 

선생님 저 마지막으로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제가 아시다 시피 오른쪽 9미리 왼쪽 6미리 였는데요, 선생님께서 제 경우였어도 이렇게 바로 수술을 하셨을까요?”


.............. 그렇죠. 수술밖에는 방법이 없는 겁니다 잘하신 거예요

 

이미 떨어져버린 갑상선에 대한 미련을 지우고자 물었던 질문인데 음- 하고 대답하기 전 잠시 머뭇거린 여운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 떨어져버린 갑상선하고 돌아서버린 정인(情人)의 마음하고는 미련을 두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내 미련을 버리자고 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었던 질문을 했던 것은 아닌지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아침 아홉시가 되자 다시 교수외진으로 내려갔는데 수술이 잘되었다는 간단한 말과 혓바닥 잡고 성대 내시경을 


한 번 더 한 다음 양쪽 배액관을 다 빼버렸다 원래 나오는 양이 일정 양 이하로 내려가야 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교수님은 그냥 살살 빼버린 다음에 양쪽 구멍에 밴드 한 개 씩 붙여주었다 배액관은 생각보다 깊숙이 몸속에 들어


있었는데 오늘 배액관을 제거했기 때문에 샤워가 다음날로 미뤄진다고 했다. 나에게는 소중한 갑상선인데 이곳 


모두에게는 단지 누군가의 갑상선일 뿐인 것 같았다 네일샵의 손톱과 병원의 갑상선이 받는 취급이 크게 다르지 않다.


 

병실에 돌아와서 걱정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물티슈로 얼굴을 대충 닦고 셀카를 보내드렸다 내가 속으로 굉장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보다는 아무것도 아니고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연락을 받으신 분들도 내가 


번거로울 걸 아셨는지 나 대신 엄마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깊은 속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성대 검사를 하러 음성검사실로 내려갔는데 검사해주신 선생님께서는 목소리는 잘나오는 


편이라고 안심하라고 했지만 스스로 느끼는 불편함은 정도가 좀 높은 수준이었다. 고음과 큰 목소리가 아예 불가능했고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영화 옹박에 나온 휠체어를 탄 악당이 내는 저음 단음으로만 이루어진 목소리였다 우리말을 


할 때 특히나 궁금한 의문문 형태의 대화를 할 때 말의 마무리를 살짝 올리게 되는데 단음으로 쭉 뻗기만 하니까 


의문형의 대화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살짝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 대화가 조금 조심스러워 졌다 


무튼 목운동을 열심히 하면 빨리 돌아온다고 했기 때문에 대안이 없었다. 배액관을 빼고 나서는 일상에서 틈만 나면 


계속 목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성대검사를 마치고 갑상선 암환자를 위한 교육을 받으러 갔다 나랑 엄마 그리고 갑상선 수술을 앞두신 아주머니한분 


이렇게 세 명이서 교육을 받았다 아무래도 나는 전 절제를 했으니까 퇴원 이후 할 확률이 높은 동위원소 치료에 관심을 


두고 질문을 했고 아줌마는 특별한 질문 없이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교육내용은 갑상선 수술이후 주의점이나 


갑상선암에 대한 소개 같은 거였는데 인터넷 갑상선 커뮤니티에서 소개되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교육장소가


암센터 였는데 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확실히 다가온다. 그냥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서 갑상선을 절제한 


환자로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가 암센터 문을 열고 교육을 받으니 확실히 갑상선 센터 문을 열고 닫을 때 와 의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나이 서른넷에 암에 걸리다니....... 그리고 암수술을 받다니....... 마음으로는 순정영화의 주인공이 


따로 없는데 거울 속 비춰지는 가족력의 현실은 무서 우리만치 냉정하다


 

별게 한 게 없는데 하루가 금세 지나가 버렸다 힘든 일을 할 때는 하루가 그렇게 길더니 놀게 되니까 하루가 흘러가는 


감흥이 없다. 원래 저녁에는 면회가 안 되는데 친구가 와서 스타벅스 커피 한잔을 하고 갔고 더 좋은 친구가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고 갔다 어차피 없는 갑상선에 깊은 고민을 하기 보다는 퇴원 이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내일 퇴원이다.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하는 사회 초년생 때의 기분이 났다 암이라는 전환점을 돌아 다시 나아가야 한다


집이든 어디든 그게 병원이 아닌것은 분명했다.


지금, 그리움만 남았다 한국


갑상선 수술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수술 전날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몇 시에수술을 시작하는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술전날 자정부터 시작되는 금식시간은 다음날 몇 시에 수술을 하던지 동일하기 때문에 어차피 


받을 수술이라면 빨리 수술을 받고 빨리 회복하는 것이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누구나 빨리 


수술을 받고 싶어한다. 어떤 병원은 나이순서대로 수술 순서를 정한다고 했고 어떤 병원은 무작위로 정한다고도 했다 


고대안암병원은 무슨 기준으로 수술시간을 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전날 밤 수술동의서를 작성하면서 들은 수술 


시간은 오전 11시와 12시 사이였다.


 

수술아침 당연히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밤새 잠을 자다가 뒤척이고, 뒤척이기를 반복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취에서 혹여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상상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수술을 하기 


위한 마취도 내가 원해서 잠시 잠드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잠들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8살 무렵 심한 중이염으로 전신마취로 수술하고 깨어날 때 의 불쾌한 기분이 떠올랐다


방법이 없다. 수술이 빨리 마치길 바라는 기분. 어른이 되고나서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굉장한 초조함 이었다.


 

물 한 방울 입으로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침에든 생각은 어젯밤 자정 전에 뭐라도 좀 더 먹어둘걸 이라는 후회도 


잠시 들었는데 이런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고 태산 같은 초조함만이 온 병실을 맴돌았다 6인실을 배정받고 같은 병실 


구성원에 대해서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이비인후과 환자였고 모두가 동일한 교수에게서 동일한 


날짜에 수술을 받는 상황이란 것을 수술 날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다. 간호사들이 아침부터 속옷 벗고 대기하라고 했고 


내 오른쪽 병상 아저씨가 제일 먼저 침상에 실린 그대로 실려 갔다. 무슨 영업 하시는 분 같았는데 병상에서도 전화를 


받다가 수술하러 가셨다. 이렇게 병상에서 환자들이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으면 간호사가 안내방송으로 알려줬다


병상 전체에 침묵만이 감돌고 엄마가 가만히 손을 잡아줬다. 원래는 입원 당일에 보호자 서명만 한 다음에 집에 


가셔셔 쉬게 해드리려고 했었는데 나도 엄마도 그러질 못했다.


 

“XXX환자분 잠시 후 수술실로 내려갈 예정입니다 화장실 다녀오시고 대기 하세요


 

수술을 준비하면서 갑상선 수술 후 후유증에 대해서 많은 검색을 했었다. 비교적 가벼운 후유증으로 수술 직후 어깨와 


목에 근육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병상에 가만히 누워 수술 자세를 상상해봤는데 내 갑상선이 가장 잘 


보이는 자세로 어깨 바로 뒤에 베개를 올려두는 자세로 판단했고 그리고 그 자세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2시간정도를 


미동도 없이 멈춰있어야만 했다. 수술 방에 가기 전에 틈나는 대로 가벼운 준비운동을 했다 운동전 스트레칭을 잘하면 


나중에 근육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병실에 침묵이 너무 힘들었다. 누구나 


자기 수술이 잘될 것 이라고 믿고 당연히 안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전신마취를 하고 내 몸을 


누군가에게 오롯이 맡겨야만 하는 그 상황이 두려웠던 것 같다.



네팔에서 수녀님이 와주셨다 수녀님도 볼일 때문에 한국에 오셨다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아픈 것 에 대해 여러 


지인들에게 알리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닌데 여러 사람들의 지나친 위로가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신적인 지주 한분 정도는....... 한분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연락을 드렸는데 수술 직전 병실에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다 수녀님께서 어깨에 손을 올리시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데에도 일순간 눈 주변이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막연한 충만함을 느끼고 


수녀님과 근황을 나누면서 수술 전까지 시간을 보냈다.


 

방송이 울렸다 내 이름을 불렀고 화장실에 다녀와서 병상에서 대기하라고 했다.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복도에서 


목운동을 하고 나오지 않는 소변을 방울까지 쥐어짰다. 간호사가 와서 영양제와 진정제라고 엉덩이에 주사를 놔주고 


갔는데 진정제를 맞으니까 거짓말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다. 몽롱하니까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이 모두 


사라졌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기분. 침상에 바른 자세로 누웠고 곧 침대를 끌어주시는 분들이 병실로 도착했다


시점이 주는 어색함이 낯설다. 약기운에 반쯤 몽롱하게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천장이 막 빠르게 움직인다


고개를 돌려 엄마를 봤는데 엄마가 울먹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울지 마시라고 피식 웃으면서 손을 잡았다


4층이었을까 수술 방 입구에서 엄마와 헤어졌고 침대를 밀어주시는 분들과도 헤어졌다 누가 봐도 수술복장을 


한분들이 내 침대를 밀기 시작했는데 여전히 반쯤은 몽롱한 기분에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간 것을 느꼈다 머리위로 천장에 조명이 보였고 영화에서나 보던 기계들이 머리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수술방 간호사는 아직 의식이 있는 나에게 수술용 침대로 건너가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조용히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서 시키는 대로 했다 교수님이 수술복장으로 들어와서 인사를 건넸다 답례를 하고 수술침대에 누웠다 


간호사는 내 손가락에 산소 포화측정기를, 몸에다 이런저런 준비를 했고 또 호흡기를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 심장이 울리는 것과 같이 울리는 걸 느낄 수 있는 짧은 비프(Beep)음을 느낄 수가 있었고 


눈이 떠졌다. 말은 나오지 않았는데 일단 되게 아팠다 아프다고 빨리 진통제를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파를 


굉장히 부정확한 발음으로 했던 것 같다 베테랑은 베테랑이라....... 내가 아프다고 말하는 걸 회복실 간호사는 


아주 잘 알아듣고는 진통제를 놔줬다 어젯밤 분명히 수술에 대해서 설명할 때 배액관 달고 나오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몸이 이상한 게 아무래도 배액관을 몸에 달고 나온 것 같았다. 웅얼웅얼 소리가 일단은 났으니까 성대는 


마비되지 않은 것 같았다. 배액관이 아쉬웠지만 성대에서 소리가 나는 것 에 감사했다 필리핀에서 아티반 갱에게 


당한 이후로 정신이 몽롱한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마취에서는 빨리 깨어나려고 노력했다. 비몽사몽간으로 


병실로 옮겨졌고 간호사가 여러 수술후 주의사항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기침 하지 말 것, 가래 뱉지 말 것, 심호흡을 


할 것, 잠들지 말 것 등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간호사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을 때 올 수 있는 부작용이 하나같이 


어마무시 한 것 들 이라서 마취가 깨어나는 그 몽롱한 와중에도 심호흡을 했다.



 

정신이 어느 정도 들고 나서 가슴팍을 보니 입원복 상의에 피와 소독약이 흥건했고 무엇보다 체액을 받아내는 


배액관을 양쪽에 하나씩 두 개나 달고 나왔다 몸 안에 갑상선이 있다가 없어져서 그 빈틈을 채우기 위해 체액이 


모인다고 했다.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몸에서 나오는 피를 받아내기 위해 배액관이 두 개나 가슴팍에 매달려 있고 


그 반대쪽 줄이 내 몸속에 들어있었다 암진단을 받고 여기까지 오는데 한 번도 환자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환자라고 느껴졌다 아프다고 안했는데 알아서 진통제랑 막 뭘 놔주는 것 같았다 원래 진통제 맞는 


걸 꺼려하는 성격인데 이것저것을 따질 상황이 못 되었다



 

물은 수술 후 4시간부터 식사는 5시간부터 가능했다 저녁 여섯시 반쯤 물을 마시고 일곱 시 반쯤 미음으로 밥을 먹었다


무언가를 먹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지독히도 고통스러웠고 나보다 빨리 수술을 받은 오른쪽 아저씨를 부러워하면서 


또 나보다 늦게 수술을 받은 건너편 환자를 위로하면서 심호흡을 하면서 시간을 버텼던 것 같다 지하층에 스무디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어서 스무디를 먹었는데 무슨 천상의 음료 같았다. 네시 쯤 회진을 오신 교수님이 아주 잘됐다고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모든 고비를 넘긴 기분이 들었다.


 

자려고 눈을 감는데 비로소 모든 것 이 끝났다는게 실감났다. 나는 이제 갑상선이 없는 사람이라는 비극적인 사실과 


빨리 회복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과 동위원소치료를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애절한 궁금증과 빨리 좀 샤워가 하고 


싶은 소소한 소망이 있었지만 그냥 덮어두기로 했다 비가오고 있었는데 가습기 없이도 습도가 높아진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을 먹기로 했다 미세먼지도 없고 호흡기에도 좋은 거니까


큰 산을 넘었다 이제부터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거다.



삶이라는 게 무척이나 주관적이라서 매사 판단의 기준이 내 마음먹음에 달린 것으로 생각한다. 비가내리는 것을 


슬퍼하고 우울해 하다가도 밖에서 비를 맞지 않음에 감사하게 되는 게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밖에서 


비를 맞아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사함 이라는 것도 잘 안다. 앞으로 더욱더 감사함에 살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지금, 그리움만 남았다 한국


입원 날 아침은 굉장히 불안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날 밤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면서 버스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불필요한 감상에 젖기보다는 한숨 푹 잠들면서 올라가길 바랐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오후 네 시 입원이었으므로 점심을 먹고 천천히 출발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전에 마음 편하게 거위랑 


닭들에게 밥을 주고 여름이와 놀아주고 있을 무렵이었다. 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 고대 갑상선 센터였다 


원래는 반 절제 수술로 계획되어있었지만 수술 전 실시한 세침검사에서 오른쪽결절에서도 암세포가 발견되어 


전 절제 수술로 진행한다고 했다. 혹시나 했었는데 엎어진데 덮어진 꼴이 되었다. 병원에서 몇 번인가 얼굴을 


마주치고 상담을 했던 젊은 레지던트 목소리인 것 같은데 바빠서 그런지 전화를 끊으려고만 할뿐 전 절제와 


반 절제의 차이점에 대해 전혀 언급해 주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되물었다 그럼 이제 평생 약을 먹고 살아야 하는 


건가요?” 모르고 한 질문이 아닌데 질문을 하고나니 질문이 참 멍청하게 느껴졌다. 수술일정을 잡을 때 무척이나 


반 절제 수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쉽게 말했던 그 젊은 의사는 이번에도 가볍게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네 평생 약을 드셔야 하구요 자세한건 이따가 오셔서 말씀 드릴게요



 

원래가 입원일이 첫 출근 날이었다. 5월 초부터 첫 출근을 하고 나가서 무엇을 할지 어떻게 지낼지 국내에서 


준비하는 기간에 입원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반 절제니까 큰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면서 스스로를 다잡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했었는데....... 바로 복귀해서 출국을 준비하길 간절히 바랬는데


바랐던 만큼 좌절감이 더욱더 크게 다가왔다. 수술 전 만났던 많은 의사들은 갑상선이 반절 없는 건 근로능력과 


무관하지만 전부 없는 건 수술 후 일정시간 경과관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 역시 자신이 없었다. 급하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 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배려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건강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건강 때문에 


일까지 잃게 되다니 무척이나 억울했다

 

일동에 차를 주차하고 버스를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올라간 다음, 신당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고대병원이 있는 


안암역으로 향했다 전날 밤 작은 아버지가 태워준다고도 했고 아버지가 태워준다고도 했지만 거절했다 꿋꿋하고 


씩씩하게 내 힘으로 이겨내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동네 마실 다녀오듯, 좋은 곳에 여행을 다녀오듯 그렇게 


마음을 먹었고 캐리어에 책도 세권이나 넣었다. 신당역을 걷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서울에서 자취할 때 지내던 곳이 


신당이라서 특별한 연고가 없는데도 기분이 묘했다 몸이 이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나는 오늘 아침 신당역에서 사무실로 


출근했을 텐데 나는 지금 캐리어를 끌고 병원에 가고 있었다. 극과 극인 삶. 입원 할 짐이 가득 든 캐리어를 끌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뱉은 한숨을 쉬었다. 1월에 끊었던 담배가 무척이나 피우고 싶어졌다 열심히 산다고 


살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한방에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었고 이렇게 무기력하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더 속상했지만 받아들여야만 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입원수속을 하고 환자복을 입었다 병실에 올라가기 전 이비인후과에 들러 전 절제 수술에 대해 


설명을 들었는데 이미 많은 정보를 통해서 내 몸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약을 먹는 나는 이제 


법률적으로 장애인이 아니지만 세법을 통한 장애인이 되는 거고 암으로 인한 한정 특례 중증환자가 되는 거였다.


설명도 간결하게 끝났고 서로 간에 묻고 대답할 질문도 없었다. 슬펐다.


 

12시까지 식사에 대한 제제가 없었으므로 먹는 불편함은 없었으나 입맛이 없었고 수술복을 입고 팔목에 팔찌를 


차고 나니 본격적으로 실감이 났다 7층에 있는 6인 병실을 배정받았는데 엄마랑 5층에 있는 소아병동 정원에 


앉아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또 억울함에 울기도 울었다 환자복을 입었으니까 환자지 나는 증세도 없고 아픈 곳도 없었다.


증상이라도 있고 아프기라도 했으면 환자복이 이런 감정을 주지 않을 텐데 어색하고 또 어색했다.


 

발암(發癌)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많이 고민해봤다 3년 전 스리랑카 마지막쯤 오른쪽 눈에 노안으로 인한 


복시증세가 있었는데 그때 CT촬영을 해서 이렇게 된 것 일까? 라는 정량적(?)인 추론부터 평소의 행실이나 마음가짐 


또 누구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스스로 복기하는 일종의 정성적(?) 복기도 해보았지만 생각만 많아질 뿐 


이내 곧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암에 왜 걸리는지 알게 되면 나는 노벨 의학상 메달로 짤짤이를 할 수 있게 되리라.


 

수술에 대한 준비 작업은 굉장히 늦게까지도 지속되었다 한밤중에 초음파를 다시하고 내 수술로 인해 나온 종양에 


대해서 의료적으로 사용하겠다는 기증서에도 자정 무렵에야 서명했다 서명을 받기위해 잔뜩 초췌해진 의사가 왔는데 


내 갑상선을 부디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 말고는 서명할 때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수술동의서도 9시 


무렵 서명했고 마취과 의사가 와서 수술 전 예진을 했었는데 옆 환자랑 나랑 바뀌어서 질문을 하는 바람에 내 앞니가 


수술 중에 부러지는 건 아닌지 잠시나마 두렵기도 했다.


 

나를 위한 수술도 중요했지만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술을 


걱정해주는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 대해서....... 내 옆에 남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늦은 밤에 찾아와주신 인연에 


감사했다. 갑상선 수술을 하고나면 노래를 부르기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집에서 올라올 때 


마지막 노래를 부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노래한곡 불러주지 못하고 이렇게 


내일 수술을 맞이한다


사랑한다는 흔한 말 한 번도 해주지 못해서 혼자 서운한 마음에

 

 


지금, 그리움만 남았다 한국


병은 자랑을 해야 낫는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갑상선 질환의 경우, 특히나 암일 경우 다들 주변의 반응이 서운하리만치 


낙관적이다 예후가 좋은 암 이라더라부터 착한 암 이라더라’, ‘그거 잘라내기만 하면 된다던데부터 요즘 대한민국 


암의 트렌드를 알려주듯 자기 주변에서 누가 수술을 했는지를 알려주고 그 사람 지금 잘 산다면서 걱정을 덜어주려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모두가 나에게 위로를 해주려고 하는 말인데 어쩜 그렇게 단 한마디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별것 아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도로 한말인 것을 알지만 당장 몸에서 무언가 자라나고 있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낙관의 위로는 오히려 짜증을 불러 오기에 충분했다


 

현실적인 위로는 더 마음을 후벼 파는 경우도 있다 보험은 몇 개를 들었는지 보장은 얼마나 되는지를 나에게 묻고


생각보다 많은 진단금과 치료비를 받게 되는 사실에 감사하자는....... 그런 위로를 하는 사람에게 진단금의 열배정도쯤


드릴 테니 우리 갑상선을 맞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는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갑상선까지 


차고 왔다가 도로 내려갔다. 남의 일이라고 너무나 쉽게 조언하고 공감하는 척 했었던 지난날의 나를 냉정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는 사람이 많은 만큼 만나는 사람이 많고, 내 몸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 피로감 을 느껴갈 때 쯤 


내 몸 상황을 회사에 설명하고 정리된 중재 방안을 도출하는 것도 꽤나 많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원래 올해 파견지로 


논의되었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까운 아시아권의 나라로 정리되는 것에도 많은 배려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마저도 불가능한 것으로 정리되었지만 이러한 상황까지 오는데 깊은 배려를 해주신 


분들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보낸 지난 시간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아픈 사람 취급을 하고 걱정을


해주지만 나는 밥을 먹을 때 사래가 들린다거나, 목소리가 쉬거나, 몸이 피로하거나 하는 일체의 전조 증상이 없었다


건강검진 결과에 따라 3월부터 금주를 했고(간수치가 높았다) 새해부터 각오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우간다에 있을 때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누구보다 건강하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수술을 선택하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리고 수술 후에도 수술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하는 미련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지만 이내 곧 내 몸에는 더 이상 갑상선이 없음을 깨닫고는 이제는 더 이상 부질없는 고민임을 깨닫는다.


 

나는 이번 수술을 통해서 갑상선을 잃고 직업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상선과 직업을 잃었다고 슬퍼하기 보다는 이렇게 좋은 직업을 통해서 건강검진의 기회를 남들보다 


자주 가질 수 있었고 초기에 갑상선 암을 발견해서 치료의 기회를 잡은 것 이었다. 절망 속에서 비참해하기보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어야만 나를 포함한 모두가 편안해질 수 있는 현실인 것인데 엄마가 치우라는 방청소가 그렇게나 하기 


싫듯 마음을 강제로 먹어야만 하는상황이 그렇게나 속상한 거였다


 

원래 내 수술일정은 좌측 6미리 결절에 대한 반 절제 수술이었다. 반만 자르는 거니까 수술 후 다음날부터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올해 계획한 일들도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초기 진단이 추적관찰이었기 때문에 


급하게 수술을 진행할 필요도 없었는데 이번 파견을 앞두고 근로능력에 대해서 의사와 상담하는 와중에 이렇게 


고민될 바에 시원하게 떼고 가자는 의사 선생님의 제안이 있었고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는 갑상선 


전문의의 소견으로 수술을 결심하게 되었다 우측 결절에 대해서도 세침검사를 하고 초음파를 찍고 CT를 찍었다 


58일에 수술하기를 원했지만 일정이 밀려 515일에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을 기다리는 시간은 무난했다. 갑상선 반 절제 수술과 근로능력에 대해서 이비인후과 전문의들과 외래 진료를 


실시하면서 상담을 하거나 갑상선 까페에 가입해서 갑상선 에 대한 정보를 얻고, 누구나 그렇듯 나는 반만 잘라내는 


반 절제니까 전절제해서 평생 약을 먹는 사람보다는 나은 상황이라는 이기적인 자기위로를 수없이 하면서 


그러면서도 막연했던 것 같다. 보험사에 연락해서 절차와 금액에 대해서 확인하고 갑상선 커뮤니티에서 말하는 


갑상선에 대해서 잘한다(?)는 병원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갑상선이라는 것이 어차피 절반 아니면 


전부였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고려대 안암병원 백승국 교수는 그렇게 친절하거나 


자상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물어보는 것만 매우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처음에는 섭섭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데이면 저렇게 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댄 


경험과 경력에 몸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참 이기적이다 수술전날 밤 바라본 거울에서 목을 10분정도 뚫어져라 쳐다본 것 같다. 슬펐고 억울했고


불안했으며 두려웠다 좋은 감정이 1도 들지 않았는데 몇일 전 부화기 에서 태어난 아기 거위 네 마리와 교통사고를 


당하고 재활중인 우리집 개 여름이를 떠올리면서 희망과 긍정의 징조로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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