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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경마의 네팔 여행기 - 1 네팔





왜 네팔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말은 없다 

군대전역후에 막연히 떠났던 몽골 여행처럼 스물 아홉의 끝자락에 서있는 나는 어디로든 떠나고싶었고 

그냥 그게 네팔이었을뿐이었다 




스물아홉 백수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인생의 막연함이라는 단어로 정리될수있는 삶이기도했고

내가 떠나는 여행은 인생의 막연함이라는 안개속에서 더욱더 깊은 막연함이라는 의미를 갖기도했다



술먹고 들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던 김광석 형아의 라이브 영상에서는 

"이십대의 끝자락에 무언가를 붙잡고 삼십대에 그 붙잡은 그것을 무조건 당기고 본다"면서

인생의 막연함을.... 다들 그렇게 사는거라면서 인생선배로서의 훈계 같은걸 해주나 싶기도했지만 

정작 광석이형은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해버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기도했으니까





집을 짓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사회복지를 전공한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누누히 말씀하셨다

"배고픈 거지에게 밥을 사준다면 거지가 똥을 싸는 순간 너는 잊혀버리게 되고 풀이 가득자란 농부의

밭을 메어 준다면 풀이 다시 자라게 되는 순간 너를 잊게 될것이다"

영원할수 없는 인생에서 풀이 자라면 잊혀지는 사람이 되기는 싫었고 똥을 싸버리면 잊혀지는 

그런 사람이 되기에는 더더욱 싫었다 






"그래 집을 짓자.."




 천년 만년은 아니더라도 풀보다는 ...한끼의 밥보다는 나의 존재를 오랫동안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지구어디엔가 있다면 나는 그걸로 됐어..라는 병맛같은 생각이 이번 여행의 시작인지도 몰랐다 




처음 여행의 시작은 그랬다 




내가 아무리 봉사활동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지만  내돈으로 자재를 산다는것은

내키지 않는일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한국과 호주를 오가면서 3D업종에 종사한 경력이있는 3D업종의 유학파라면서

스스로를 자부심있게 생각하는 존재였으며 나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이외에도 특수용접사 지게차 산업안전등

곱게 글을쓰는 심성과 정반대로 - 생긴대로 노는 20대 후반 건설업의 자라나는 샛별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있었음....)



처음 연락을 시도한곳은 한국 해비타트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전화기넘어 목소리를타고 오는 강한 매너리즘 

"봉사를 하시려면 자재비 5천불정도를 부담하셔야 하구요 교육받으셔야 하구요 기간도 한 보름정도...블라블라"

다른사람을 상대하는것이 부담스러울정도의 지침....매너리즘을 넘어선 지친목소리...

당신같은 사람은 하루에 수없이 통화 한다는 무성의로 점철된 말투  이렇게 난 한국 해비타트에서 첫번째

 거절을 당했다 



두번째 연락을 시도한곳은 네팔 해비타트였다 의외로 나의 이메일에 좋은 응답을 보여주는듯 하였으나

역시 현재 네팔에서  일할수있는 공사현장은 없다면서 이메일로 오랜시간에걸쳐서 거절당했다 

국제전화까지 하는 열정으로 봉사를 시도하였으나 매우 정중하고도 칼같은 거절을 당함 두번째 거절

(카트만두 공항에서 해비타트 봉사자 픽업을 나온 손간판을 보고 달려가서 따지고싶은 충동을 느낌)



세번째 연락을 시도한곳은 "네히트" 라는 네이버 히말라야 트래킹 정보 커뮤니티였다 여기선 글을 올리자마자

바로 댓글이 달렸는데 정준호 이문세가 네팔 시골에서 학교를 짓는다고 바로 투입하면 "일당" 을

받을수있을거라는둥 바람을 많이 넣어줬었다 들뜬 마음에 한국에있다는 코디네이터와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네팔 사람과 우리끼리 현장이 아주 잘 돌아 가고있는데 당신이라는 사람을 넣어서 오게 될 리스크를

감당하고싶지않다 그리고 나는 더욱이 한국사람과 일하지않는다 "

라는 세번째 거절을 당했다 개인적으로 이사람 홈페이지까지 운영하면서 대외적으로 네팔 봉사킹의 모습을

보여주는것같지만 막상 이렇게 거절을 당하고보니 - 또..연예인들을 부를때 "형님 형님" 하면서 부르는....

이런 모습을 되새겨보니 ...... 카톡 프로필 사진에 아이들과 웃고있는 모습역시 진짜인가 껍데기인가 하는

큰 오해를 하게 되었고 지금도 하고있다  .... 아직도 섭섭하다 나같은 고급인력을 무시하다니....




이렇든 저렇든 거절이라는것은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다







                                 (호주에서 공구리를 치던 시절의 고급인력 .JPG 혐오사진 미안하다....)






나도 연예인 인맥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지만 (조금있다 조금)이런 봉사를 가는데 이렇게 "구걸" 까지 해서 가야하는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의문이 강하게 나를 휘감았고  

봉사가 안되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나 다녀와야지 하면서 고산병약인 비아그라와 예방약 다이아막스등

트래킹의 길 역시 틈틈히 준비했다 




이러한 구걸의 중간에서 또 나는 다른 방법의 봉사컨택을 시도했는데 코이카 네팔사무소 (아예 응답을 안하는

개무시당함)와 코이카 단원까페에서 네팔단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래도 업종(?)이 많이 다른관계로

건축현장에 대한 소개나 연결의 도움은 받을수없었다 



맨날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검색했었는데 혹여나 하는 마음에 다음에서 검색을 해보았고

서울뚝배기라는 한국 식당과 컨택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좀 쉽게 일이 진행되는데 이식당에서는 내게

네팔에서 귀한 "소주" 를 가지고 와준다면 일체의 제반사항을 도와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것이다 

"포카라 구석 빈민촌에서 수녀님이 공부방을 운영하시는데 거기가면 건설현장이 있을것이다 

거기서 무엇이든 지으면 된다" 라면서 엄청 쉽게 그동안의 거절과 고민을 한방에 날려주는 단비와

같은 통화를 070 인터넷 전화기를 통해서 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위에 거론된 내가 거절당한 단체에게서 환영받는 공통된 방법이 딱하나있었다

바로 "기부금" 이다 "돈"을 낸다고 하면 "돈"을 낸다고 의사를 표현하는 순간부터 이미당신은

VIP 매우 중요한 사람 취급을 받을수있다 이들은 검증되지않은 봉사자의 "인력"보다 검증된

기술자를 고용할수있는 "기부금"을 더 환영하는 편이다





큰맘을 먹고 많은것을 포기하기로했다 개인수하물 30KG 제한에 걸리는 개인용텐트, 오리발을 포함한

스노클장비(만년설이 녹은 페와호를 헤엄쳐서 건너고싶었다)를 포기한것 외에도

네팔에 봉사간다고 지인들로 부터 받은 노트와 공책을 모두 택배로부치고 개인연장과 소주만으로

짐을 꾸리는 초강수를 두기로했다   - 그렇다 나는 "소주"를 너무너무 사랑한다 




나는 외아들이기때문에 부모님을 설득하는일 역시 조금은 버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서른부터는 정신을 차리겠노라 굳은 맹세를하고 이번여행을 마지막으로 여권을 반납하겠다는 

굳은 결의도 했다 더욱이 "내돈"으로 가서 스스로 좋은일을 하겠다는데 백수인 아들 말릴

명분이 우리 부모님에게도 좀 부족했지 싶었다 




목표가 정해지면서 네팔의 막연함이 어느정도 해소되는듯 싶었다 적어도 네팔에가서 찾아갈 목적지가 

생겼다는것만으로도 카트만두 공항에서 내리고나서 오게될 멘탈붕괴는 미리 잘 예방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페북으로 자랑도 좀 했다 남들이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자랑 -  나는 늘 그래왔었다 남들이 

잘하는일에는 흥미를 느끼지못했다 "누구나"와 같은 보편적인 단어안에는 내가 설자리가 없는것같았다 

남과 다른일 - 이번역시 남과 다른일이니까 자유로운 내 삶에대해서 그리고 모든걸 비우고 오게될 네팔에

대해서 허세를 듬뿍 담아 몇자 적어줬다    부럽다는 댓글들... .....가고싶다는 댓글들...

하지만 나는 잘알고있다 "부럽다 가고싶다" 와 비행기표를 구매하는 나사이에는 조금 큰 틈이 존재한다는것을




하고싶지만 할수없는사람과 하고싶은것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사람 







죽음의 문턱에 몇번 다녀온 나는 "지금 아니면 할수없는일" 에 대해서 끝없는 애착을 넘어선

집착을하게된것같다 








사실 이번 네팔 여행을 고민하면서 갈까 말까 고민중이던 나에게 대한민국의 한 카피라이터는 

나의 고민해결을  한방에 도와주었다 











그래 인생은 한번뿐이니까.........

덧글

  • 2013/11/24 06: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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