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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파라 생활 2015년 4월 19일 - 자유형식 2차 반기 활동보고서 스리랑카

암파라에 도착한지 어느덧 일년이 다되어간다. 스리랑카에 도착한지는 일년이 넘었는데 국내교육때 부터 꾸준히 생각해왔던 어떻게라는 화두를 두고 그야말로 어떻게풀어 나가야할지 한밤중에 이불속에서 눈을뜬 사람처럼 여기가 어디쯤인지 방향은 아직도 캄캄하기만 하다

 

코이카 명패를 달고 해외로 파견되는 수많은 파견인력들 중에서 중요한 시점에 조언을 얻을 수 있는 선배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이들며, 더욱이 나 같은 희귀분야 봉사자일수록 이러한 고민을 풀어나가는 방법은 스스로 이루어나가는 치열한 고민밖에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고민의 여러 방향과 수많은 헛발질(?)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뒤에 스리랑카에 그리고 암파라에 오게되는 후임단원들의 불필요한 실수의 크기와 횟수를 줄이고 본인이 생각하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89기 선배단원의 노력을 잊지 말길 당부한다 (본인의 경험을 공유하되 강요하지말자는 교육원 원장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해외봉사 전 준비

 

본인이 코이카를 처음 접하게된 것은 ‘2012 코이카의 꿈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선발되기에 턱없이 부족한 자격요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인연으로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짧게나마 코이카 봉사단원 체험을 해볼수 있었고 해외봉사와 공적원조(ODA)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스스로 대학전공이 사회복지였으나 필드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일찍이 건축업 및 용접이라는 상대적으로 다른분야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러한 전공과 경제활동의 경험을 모두 활용하여 생산적인 봉사활동을 하는데에는 코이카 해외봉사활동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사전연습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개도국에서 주어지는 제한적인 생활비를 가지고 (그것도 남을 도우면서)생활해보는것에 대해서 살면서 단 한번도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인이 반드시 이일에 대해서 책임과 흥미를 가지고 보낼수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의 확인()이 필요했다 1년 미만의 단기활동이라면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버틴다는 사명감으로 완수해낼 수 있는 기간이지만 2년의 기간은 지금도 추억하는 군대처럼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네팔로 떠나기 전부터 그리고 떠나고 나서도 참 많은 인연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한달 반 동안 빈민가에 벽돌집 집 두채를 완성할수 있었다

 

*아마 이 두 개의 집은 인생사진으로 평생 따라다닐 것 같다 그래서 좀안간 AS를 가야겠다고 다짐하고있다

 

이러한 개도국에서의 삶에 대한 연습은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그리고 코이카를 떠나오는데 매우 값진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내 돈과 내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동들에 대해서(그리고 그것 때문에 따라오게되는 치열한 피로감 역시도) 반드시 행복하다는, 행복감을 느낄수 있어야했고 개도국이기 때문에 수반되는 여러 불편함마저도 개도국이기 때문에 즐긴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외국인이 혼자의 몸으로 빈민가에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간단하게 정리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좋은사람들 좋은인연들 로 가득찬 행복한시간을 마칠수있었다 사회복지를 전공하면서 꾸준히 생각해오는 화두중에 하나가 내가 고민할수록 나아지는 타인의 삶이었는데 네팔에서 했던 고민들만큼이나 내 고민들로 나은삶을 가지게된 친구들을 보면서, 이러한 현지인의 삶의 변화와 더불어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코이카에 지원해도 되겠다는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문제는 가족이었다 외아들이기 때문에 외국 생활을 하는것에 대해서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 많으셨고 호주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면서 네팔여행이 마지막 여행임을 부모님과 약속하고 떠난 길이었는데 네팔 빈민촌 수녀님의 엽서 한 장이 어머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부모님은 나의 코이카 봉사활동을 허락해주셨다

 

임지에서 느끼는 감정의 단편들

 

아쉬운 부분도 안타까운 부분도 많이 있는 것이 아쉽다 교육원을 떠난지가 어언 일년이 넘었는데 교육원에서 헤어질 때 주고받았던 몸만 건강히 돌아오는 것도 큰일을 해낸 것이다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고 있다 현지교육을 받을 때 봉사자에 자세에 대해서 교육해주셨던 태권도 사범님이 계셨는데 이 말씀을 기반으로 더 깊이있는 고민을 통해서 봉사자의 값어치에대해서 도달할수 있었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숨겨진 제반비용을 제하더라도 한달에 현금으로만 670불이다 주거비 170불에 생활비 500불인데 이 돈의 출처를 무시하더라도 내가 과연 670불의 가치를 하고있는 선생인지 (혹은 봉사자인지) 스스로 생각해보면 가끔 소름끼칠때가 있다 현지인 선생의 월급여가 150불이 채 안되는 상황에서 현지인 선생에 네배를 더받는 내가 과연 네배만큼의 가치를 해내고 있느냐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더운 여름 달궈진 뜨거운 바위를 맨발로 걷는 것 만큼이나 뜨거운 반성이 가슴을 후려치고 지나간다 어쩌면 더운날씨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스스로가 열대의 늘어지는 날씨에 마음까지 적응해버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만드는 자성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할때가 있다

 

처음 임지 사진을 접했을 때 기대보다는 난감함이 가득했다 똑바로 된 기계도 없었고 철지난 가스용접을 가르치는 시설에 대해서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의 필요성이 현지 교과과정과의 괴리로 다가왔다 더욱이 임지에 부임했을 때 재료와 출석관리를 제외하고 단순하게 기술만 가르치면 될 줄 알았는데 출석관리부터 재료의 관리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학생들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아가는 자리였다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로, 돈을 받고 파견되는 기관이 아닌 만큼 어느 정도 부족한 사전정보와 지식은 긍정의 힘으로 좋게넘기고 넘긴 다음을 걱정하기로 했으나 나의 길을 따라오게 될 후배단원들을 생각하니 앞길이 난감했다 선배단원으로서 좋은 보고서는 아닐지라도 양이 많은 보고서내지는 현지가 어렵다면 국내에서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고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주며 실수에 쏟을 에너지를 더 앞으로 더 멀리 나아가는데 쓰여 진다면 파견 20년을 맞는 스리랑카는 비교 가능한 봉사기관보다 훨씬 멀리 나아갈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봉사자의 가치를 고민하다가 현장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현지교육을 시작하면서부터 주재국내 산업수준에 대해서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했고 임지에 부임해서도 정보를 모은다고 모았었는데 막상 현장사업 뚜껑을 열고 보니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히 산업에너지 분야에서 축척된 분위기나 노하우가 전무했기 때문에 지금은 유흥업에 종사하시는 과거 자동차 정비공장을 운영하시는 교민으로부터 정보에 대한 많은 도움을 얻었다 활동분야갸 용접이다 보니 가장 기본적인 지식인 어디에 가면 어떤 물건이 있을 것이다조차 전무하였었는데 교민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헤메이고 얼마나 바가지를 썼을지 지금생각해도 암담하다

 

개도국에서 구매는 참으로 매력적인 행위인 것 같다 전에는 물품을 구매하는 바이어라는 직업에 대해서 왜 돈주고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 직업인것인가 에대해서 생각을 하곤했 었는데 현금들고 현장으로 나서보니 바이어라는 직업이 대단해도 보통 대단한 직업이 아니다 흥정하고 조건을 달고 때로는 화를내고 겁을주면서... 언어가 완벽하게 통하지않는 외국인은 현지인들 눈에는 먹기좋은 먹잇감으로 보일수있다는것도 다시금 깨달았고 내 가방안에 들어있는 돈이 국가의 세금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바가지를 최대한 안 쓰기 위해서 노력했다 ( 세금에 대한 몰입을 높이기 위해서 그동안 먹은 주류의 국세를 떠올리면서 긴장감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더불어 예산을 절감할수록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간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 그러나 아무리 조사하고 정리한다고 해도 어려움은 존재하기마련이고 쉽게 끝날 줄 알았던 현장사업은 주재국내 폭우로 인해서 한달, 대통령선거로 인해서 이주정도 공사현장이 정지 되는 기염을 토한다 문득 스리랑카를 떠나던 선배단원의 전언이 떠올랐다 현장사업은 늦어져야 제 맛이라면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었는데 지금에서 그 미소를 깨닫고 너무 섣불리 현장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때늦은 생각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사업은 성공리에 마무리가 되었다 고급 교육시설이 밀집되어있는 서부지역에 비해서 뒤처지지는 시설이 아니고 스리랑카 동부에서 제일 우수한 용접 교육시설이라고 자부 한다 다만 이렇게 주어진 시설에 대해서 어떻게 운영할것인가?’ 라는 난제가 화두로 남았는데 그래서 오리를 키우기로 했다 부임하고있는 내년 3월까지는 비축된 자재와 재료를 가지고 수준있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겠지만 내가 떠나고 난 뒤를 반드시 생각해야만했다 국내교육때 부터 오리와 닭을 키우는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었는데 용접단원이 오리를 키우는것에 대해서 다들 재미있어하거나 농담식으로 대했는데 나는 정말 해냈다 부임하고 나서 집뒤에 열 마리정도를 키워보면서 수익성과 오리사업의 난이도를 파악했고 지금은 학교에서 총 마흔 여섯 마리의 오리가 자라고 있다 세달 정도면 팔 수 있는 무게로 자라게 되는데 콜롬보에 위치한 한국식당에 납품하게된다면 그리고 이 거래루트가 꾸준히 지속될수 있다면 학교와 코이카 현지 교민들까지도 보람찬 오리고기를 먹을수 있게되는 것 같아서 생각만 해도 보람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리랑카 현지는 오리고기가 굉장히 귀한편이다)

 

현장사업을 진행하면서 지인 두분이 스리랑카 암파라를 방문해 주었다 한명은 고등학교 친구이면서 함께 용접의 길을 걷고있는, 지금은 세네갈 파견된 100기 이형우 단원이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에 잠시 들러 공사를 하고 함께 스리랑카를 여행하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는데 스리랑카에서 함께 있는 두달 동안 주구장창 빔만 때우고 아이들을 지도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개도국에서의 용접 봉사단원 생활이 얼마나 치열하고 벅찬지 두달 동안의 스리랑카 생활을 통해서 스스로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코이카 봉사단에 문을 두드렸다 현장사업의 많은 부분을 함께하며 성공적인 현장사업을 위해 본인의 즐거움을 많이 희생했다 세네갈에서도 본인 뜻대로 본인에게 닥친 고난이 타인의 행복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를 기도해본다

 

다른 한분은 친척 삼촌께서 방문해주셨다 평소 나의 봉사활동에 큰 관심을 보이시고 간간히 연락만하시다가 어려운 걸음으로 스리랑카에 와주셨는데 내부 작업장 도색과 외부작업장 콘크리트 타설을 함께 해주셨다 한국에서 크레인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서 처음 공사현장을 보시고는 한달안에 끝난다고 호언장담을 해주셨었는데 몇 일만에 스리랑카 스타일에 적응하시고는 묵묵히 함께 일해 주셨다 삼촌께서는 작업하는 인부들에게 돼지 한 마리를 내주시어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학부형과 학교 공사 관계자 모두를 모시고 잊지못할 크리스마스 파티가 될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계시는 동안 고아원과 빈민가를 방문하시면서 기부활동도 벌이셨는데 안타깝게도 계시는 내내 스리랑카는 우기를 맞이해서 암파라에 있는동안 맑은 날이 없었다 지금도 함께 시간을 보낸 단원들과 (심지어 나보다) 많은 연락을 하고 계시며 간간히 물고기를 잡는 투망, 소주, 달력을 보내주신다

 

대부분의 봉사단원들은 지인이 오게 되면 함께 여행을 하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고 휴가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지인 두 분은 휴가나 여행이 목적이 아닌 봉사와 기부가 목적으로 다른 지인들의 방문보다 더욱 반갑고 귀중한 방문이 아닐 수 없다 6월말 미국 NGO에서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는길에 스리랑카에 들러 형사는 곳 한번 보고싶다라는 후배의 방문도 기다려 진다 현관문 문위에 공자님 말씀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를 붙여두고 사는데 주위 사람들과 보내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시간들이 멀리서 까지 손님들이 찾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현장사업을 마치면서 잊을 수 없는 작업을 한 개 해보려고 많이 노력했다 처음에는 암파라 탱크에서 탈 수 있는 보트를 제작해볼까 고민해보기도 했으나 스리랑카에는 강도가 보전되는 알루미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포기하였으며 사탕기계를 만들까 고민하였는데 사탕기계를 만들고 나서 후속으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주지 않는다면 고철덩어리로 변하게되는 현실이 두려웠다 후임단원이 도착하고 나면 후임단원과 함께 업무 인수인계를 하게되는 한달동안 (시간이 허락된다면) 함께 만들게 된다면 서로간에 뜻 깊은 교류가 될것같다

 

현지어가 어느정도 입에 붙으면서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들리지않았던 것 들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어느정도 간단한 흥정까지 할수있게된 지금에서야 부임초반 그냥 넘어갔던 이야기들이나 행동들을 교정해줄수 있었고 이것은 결국 아이들이 더욱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기술을 습득하는데 도움이 되는 길이되는 것 같다 그러나 애석(?) 하게도 읽거나 쓰는 것은 하나도 못하고 문장을 통으로 외워서 말하는 기술만 배우게 된 것 같아서 하나도 아쉽지가 않다 스리랑카는 관리요원을 파견할 때 조차 영어권국가로 표시되어 현지어의 중요성을 한수 접어두는 경향이 있는데 봉사자나 현장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싱할러나 타밀어 둘 중에 하나로만 의사소통을 하게된다는 점, 부임초반에 아이들 붙잡아두고 영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해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자다가 이불을 발로 한번 씩 차게된다

 

임지에 부임하고나서 일년정도 지났다 손으로 밥을먹는데 딱히 불편함이 없으나 손을 강하게 씻어야하고 식사후에 손에 남는 카레향기가 아직 힘들기 때문에 될수 있으면 도구를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스리랑카 현지에 도착해서 일년이 다되어갈때쯤 라텍스를 알게되었다 스리랑카가 유명한 고무나무의 산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라텍스 제품이 한국까지 수출될정도로 좋은지는 몰랐다 12월 즈음 허리가 심하게 아픈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허리에 관련된 매트리스나 본격적으로 베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심야버스에 무거운 라텍스 메트리스를 들고와서 방에 부려두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잠은 정말 꿈조차 없었던 꿀잠 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먹는 것 자는것에는 큰 불편함을 못 느끼고 있으나 배설하는데 있어서 아직 어려움이 있는편이다 어릴적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러운 화장실을 이용하는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기보다는 화장실을 이용하고나서 뒤처리를 하는데에서 오는걱정이다 이미 내 직장은 스리랑카에 완벽하게 적응하게 되었는지 물총(?) 이라고 불리우는 스리랑카식 비데가 익숙해져버렸고 한국에서처럼 휴지를 사용하게 되면 거친 감촉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처럼 스리랑카에 나는 소리소문없이 스리슬적 적응해버린 것 같아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남은 일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을 때 휴지로 마무리 해야하는 것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남은 일년을 한국에 성공적(?) 으로 복귀하기위해서 반대로 휴지에 대한 적응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취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따금 콜롬보에 올라갈 때 만나두었던 현지 한국기업 사장님들과의 인연과 더불어 스리랑카의 경제성장율 만큼이나 스리랑카 사회는 용접사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아이들 취업은 정말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되려 아이들이 진로를 골라서 선택할 카드가 있었다는 것 에대해서 이시기에 봉사단으로 온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반장인 쟈머러는 한국에 가기위해 90기 한국어 교육단원이 교육하고있는 용접반 맞은편건물에서 오전에는 한국어교육 오후에는 알곤용접을 배우고있고 조용하고 침착한 하샨은 스리랑카 전력에 취직해서 제자들중에 가장 큰월급을 받는다 (하샨은 거의 한화 기준 45만원 정도를 받는다) 그래서 이따금 학교로 찾아와서 선생님에게 밥한번씩 쏘고간다 나머지 여섯명 프레밧 수뿐 수데스 수부응 아싯다 사낏은 콜롬보 소재 한국기업에 취직시켜주었으냐 (암파라 지역 평균임금 월 150- 한국기억 월 350불내외) 몸이 약하고 장난치기를 좋아해서 걱정이 많았던 프레밧 수뿐 수데스만 콜롬보에 남고 사낏은 암파라에 위치한 난다세나 모터스라는 자동차 공업사로 옮겨서 용접사로 활동중이며 수부응은 이웃마을인 아누라 다푸라에 쓰리휠 정비반에 진학하여 용접과 쓰리휠 자격증 두 개를 노리고 있다 제일 걱정이었던 아싯다는 할머니가 편찮으신 관계로 집에서 할머니 병간호를 하고있다고 마지막 연락에서 확인했다 이들이 콜롬보에서 적응하지못한가장큰이유는 물가였다 암파라에 비해 두배 내지는 세배가량의 임금을 받아도 암파라보다 세배이상 높은 콜롬보의 물가를 고려했을 때 도저히 감당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 두달만에 암파라로 내려온 제자들에 대해서 실망하는 감정이 앞었으나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고 나니 각자의 사정과 이유에 대해서 듣고나니 내 제자들은 실패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몇 달전 동기 시니어 선생님과 식사중에 대화를 나누면서 후임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일년을 넘어가는 지금 반드시 후임에대해 고려해야함이 옳은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용접이라는 분야가 워낙 희귀한 직종이기도하고 모집자체가 어려운 직종이기 때문에 후임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고 내가 떠난뒤에 누군가가 남아서 가르쳐야 한다면 작년 졸업생중에 한명이 남아서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 입장에서 졸업생들에게 제안하기 조차 어려운 부분이 스리랑카 기술학교 교사 초임이 만육천루피인데 반하여 급변하는 스리랑카 노동시장에서 용접사의 초봉이 사만루피에 달했다 임금이 두배이상 차이가 나는데 학교에 남아서 선생님을 하라고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 조차 조심스러웠다

 

새로운 학생들도 재미있는 녀석들이 많다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에 왔으나 여성스러운 핑크색 가방을 좋아하는 구렛나룻 수염이 풍만한 딜립이나 나말딸라우 출신으로 동물을 잘 죽이고(도축) 털을 잘뽑는 반장 딜랑커사탕수수가 유명한 힝구라나 출신이며 손재주가 좋은 사미르단순한 것 같지만 선생님말씀이라면 죽는시늉까지 하는 고집있는 위제학부형중에 아버지가 가장 재력있는 니메스” (아버지가 군인 관사 관리인인데 이녀석만 쓰리휠을 타고 학교 출퇴근을 한다) 부모님이 안계시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작년 아싯다를 떠올리게 하는 히메스나중에 사정사정해서 겨우 편입시켜준 락말이 일곱명의 학생들이 올해 용접을 배우는 학생들이다 작년에는 임지부임이 6월초로 교육할 시간이 부족한편이었지만 가르칠 것도 아크용접과 가스용접밖에없었는데 올해는 평소처럼 1월에 학기가 시작하였지만 티그용접과 미그용접 플라즈마 절단을 함께 해야하는점에서 작년만큼의 시간적 여유나 압박을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바쁘기 위해서 온 스리랑카이기 때문에

 

취미생활이 발전하지 못한것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는편이다 전반기에는 그림과 글씨 바이올린과 낚시 등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보냈는데 현장사업이 개시되고 나서부터 간간히 낚시만 다녀오고있는 편이다 다행이 신규봉사단이 스리랑카에 입국할 때 낚시용품을 전달해주어서 스리랑카에서 유일하게 낚시 캠핑 풀셑을 보유한 한국사람이라고 자부하고있지만 애석하게도 체력적으로 늘어진 요즘은 이런 박력넘치는 야외활동이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추수가 끝난 요즘은 밤마다 코끼리가 많이 나타나고 악어역시 많이 출몰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수족관을 하나 멋지게 만들어서 베란다에 두고 장어와 역돔을 키웠었으나 콜롬보에 다녀온사이 정전으로 펌프가 순환되지않아 귀한 물고기들을 그냥 버릴수밖에없었다 참으로 아쉬운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10월경 평소 낚시를 하는 암파라 저수지 포인트 말고 제방너머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다 평소 지렁이를 쓰다가 새우라는 미끼에 호기심을 가지고 도전해보았는데 한국명 빠가사리(동자개) 및 뚝지(얼룩동자개) 등 매운탕을 끓이게되면 맛있는 어종들이 많이 잡혀서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아무리 고기가 많이잡혀도 낚시란 무릇 조용히 호젓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색하는데 중점을 두고있는 것 인데 술에 잔뜩 취한 현지인이 오더니 낌블라 낌블라를 술냄새와 함께 연방 외쳐대며 나보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보통의 현지인 답게 내가 잡은 물고기를 뒤집어서 확인해보고 한국에서 가져온 낚시 용품을 신기한 듯 둘러보았다 이런 방해가 너무 귀찮았던 나는 가라 제발 가라를 연발 말하면서 내쫒았는데 이사람이 또 저멀리 떠나면서 잔뜩 취한 목소리로 낌블라 낌블라를 말하면서 사라졌다 별 이상한 사람 다보겠다면서 혼자 생각하고나서 다시 낚시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한 10여분쯤 지났을까 낚시대 찌너머로 나보다 두배는 큰 악어가 물위로 떠올랐다 나는 기겁을 하고 천천히 장비를 챙겨서 안전하게 빠져나올수있었지만 낌블라악어라는 싱할러 단어는 죽었다 깨나도 잊을 수 없는 배움을 한것같다

 

스리랑카에 있는 자이카 단원들과 교류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공감하는점은 스리랑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국가나 단체, 조직을 운영하는데 에있어서 원칙이나 규칙보다는 누가 누구를 얼만큼 알고 친한지로정해지며 이 일련의 들이 얼만큼 단단하냐에 따라서 이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고 활동범위가 정해진다 85년에 태어난 나로서는 선진화된 지금의 대한민국보다는 과거 내가 자라온 시골에서의 의사결정방식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수 없기 때문에 스리랑카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완벽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이해하는 편이다 권위에 대한 복종이나 자발적인 존경심, 힘에대한 복종심은 무서우리 만치 정확하며 자신이 이길 수 있다혹은 만만하다라고 생각되는 존재에 대해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논리로 접근하는 모습들이 우리나라의 지나온 70년대 의 세월상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하고 반대로 이런모습을 마치고 달라진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안도감 마저 느낀다

 

코이카 봉사활동을 하게되면 안타까운점 하나가 본연의 활동범위를 벗어나는 인간관계를 만들기가 힘들다는점이다 매일 기관과 집을 오고가게되면 만나는 사람은 한정적이 되어버리고 이것이 일년정도 반복하게되면 내가 만나는 현지인은 나에게, 나는 그 현지인에 적응되어버려서 무언가 새롭다 라던지 숨겨진 주재국내의 사실이나 진실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학생들은 처절하게 가난해서 기술로 인생의 승부수를 띄운 사람들이고 선생들은 이러한 정글속에서 학위를 통해서 자격을 취득하고 취업에 성공하여 안정된 인생을 살아가는중인 사람들로 나도 모르게 어느새 현지인조차 부류를 정리하고 구획을 나누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현지인들과의 만남을 하고자 한국경험이 있는 현지인을 찾는다면 이들의 한국에 대한 경험이 긍정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만남에 리스크를 내포하고있는 것 이며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으로 외국인인 나를 이용하지 않으면서, 그동안 만났던 부류의 사람들과는 다른, 일방적인 도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지인을 찾기가 힘들었다 스리랑카는 의외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저조한편이다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남쪽이냐 북쪽이냐부터 물어본다

 

최근 94기 동료단원을 통해 한국에있는 스리랑카 대사관에 오랫동안 근무한적이 있는 현지인을 만났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투나 행동하나가 여유로웠고 심지어 점심을 우리에게 마음편히 제공하기까지했다 그동안 치열한 삶에 치여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던 현지인들만 만나다가 이렇게 상류층 인사를 만나게 되고보니 감흥이 새로웠다 원래 유복한 집안출신에 매형의 힘으로 경찰이 되고 또다른 매형의 힘으로 한국에 있는 스리랑카 대사관으로 파견나갈수 있었다는 그사람의 성공적인 인생담보다는 60년대 혹은 70년대처럼 집에서 부리던 하인과 일꾼을 대하는 태도에서 스리랑카의 현재 부유층을 읽을 수 있는 척도를 만난 것 같았다

 

임지인 암파라는 이웃 마을인 쌈만뚜라이까지 약 10킬로 미터 떨어져있으며 이 쌈만뚜라이와는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백퍼센트 다른 이질감을 보여준다 암파라가 스리랑카 대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러 민족의 도청소재지라면 쌈만뚜라이와 그너머 칼무나이 아까라이빠뚜 세지역은 타밀인종의 무슬림 사람들이 98퍼센트 이상 거주하는 스리랑카 무슬림의 코어이다 버스를 타고 30여분 정도만 가면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열려있는 것이다 이들은 간단하게는 소를 먹는지 안 먹는지부터 읽고 쓰는 언어, 복색, 문화 전반에 걸쳐 다른모습을 보여준다

 

암파라에서 구하기 힘든 소고기를 버스타고 30분만 쌈만뚜라이에 가면 길거리에 걸어두고 팔았다 무슬림 음식이 싱할러 음식보다는 맛있는 편이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몇 번 넘어가곤 했고 94기 한국어 단원의 임지가 쌈만뚜라이 였기 때문에 가는길 오는길에 맛있는 음식을 부탁해서 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타밀이라는 민족에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타밀 디아스포라 때문에 내전을 벌였고 유태인처럼 자신의 나라를 찾겠다는 열의로 시작된 내전이었지만 쓰나미 내전종식 효과로도 설명하기 힘든, 그들 스스로의 결속력이 약했다는 평가를 지울수가 없다 타밀사람들이 똑똑하고 영어를 비롯한 각종 언어습득에 빠름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장점을 전쟁과 나라찾는데 장점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사회적 계급차이가 빚어낸 결속력의 약화를 이야기 하고싶다

 

학교 기관장이 무슬림이고 타밀인이며 호주에서 유학의 경험이 있다 지역에서 명망받는 교육가이고 지역 유지다 그런데 신규 교원이나 근무원 임용을 보면 타밀인위주로 뽑는다 대놓고 내색은 하지않지만 타밀과 싱할러의 경계지역에서 타밀인들이 싱할러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돕고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행동이 나쁘다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 탕평책처럼 2015년 스리랑카에도 민족간 균형을 위한 국가적인 프로그램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선이 종료되고 스리랑카는 변화가 없다 적어도 암파라 만큼은 기존에 기득권을 유지하던 사람들이 꾸준한 기득권을 유지하고있으며 새로운 대통령 시리세나는 집권 100일 계획을 발표하면서 타밀인에대한 계획을 제외하고 발표하였기 때문에 90퍼센트 이상이 시리세나를 지지했던 무슬림코어 세지역에서의 민중봉기를 내심 기대 했던것도 사실이었으나 강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구시대적 사회습성과 더불어 그밥에 그나물이라는 정치에 대한 뿌리 깊은 환멸이 스리랑카 내부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재미있는 것은 시리세나의 복과 운이다 미국의 셰일석유를 통해 국제유가가 대폭 하락되었고 에너지를 100퍼센트 수입하는 에너지 의존국가인 스리랑카는 무역수지에 엄청난 혜택을 보게 되었다 새로 집권한 시리세나 대통령은 이를 발빠르게 이용하여 버스비 및 전기 가스비를 대대적으로 인하하였으나 국제유가에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바뀐 대통령의 위대한 통치업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두고 일방적으로 안타깝다고 질타할수도 없는 것이 새로운 대통령의 혜택으로 무더위의 날씨에 봉사단원이 에어컨을 트는데 고민을 조금 덜하게 되었다 시리세나 만세!

 

애견 땡칠이는 이제 1년이 다되어간다 정글에서 태어난 땡칠이는 한국사람 손에 길러졌기 때문에 야생의 습성을 많이 잃어버렸고 보통의 스리랑카 개들과 달리 장난기 많고 어리광만 부리는 어린이 강아지인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부쩍 자라있었다 현장사업을 진행하느라 산책을 못시켜준 미안함으로 목줄을 풀고 지내게 했었는데 동네 개들과 어울리나 싶더니 집나간지 몇일만에 돌아와서는 부쩍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장난도 잘치지않고 얌전히 있어서 아픈 것은 아닌가 걱정을 했었는데 집주인 아줌마 말로는 임신을 했다고 했다 한국에있는 어머니께서 땡칠이를 한국으로 데려올 것을 먼저 제안하셔서 언어의 문제와 기후의 문제를 고민해보고 데려가자고 말씀드렸었는데 땡칠이가 만약 강아지를 낳게 된다면 암파라에 두고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땡칠이가 심적으로 외롭고 힘들 때 많은 힘이 되어주었는데 이별을 생각하니 벌써 아쉽다 내일부터 사료를 조금더 많이 줘야겠다

 

 

4월의 방학을 해비타트 봉사활동으로 보냈다 처음에는 스리랑카 야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하신 박철순감독님을 따라다니면서 국가대표팀을 훈련을 보좌하는 것으로 방학을 보내려고 했으나(스리랑카 주재 한국인중에서 영어 싱할라어 야구를 함께 어느정도 구사하는 것이 본인분이라고 스스로 자부했다) 프런트에서 연락이 늦어지는 바람에 해비타트로 마음을 굳히고 해비타트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기술적인 봉사활동보다 노력봉사활동이 대부분이었지만 무더위의 열대날씨에 벽돌을 나르면서 (성적취향이 올바르고 독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행복한 감정을 느꼈으며 다가올 남은 건기의 더위를 건강하고 슬기롭게 보낼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은것같다 국외휴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서 선택한 해비타트는 무력해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장기 봉사자에게 짧은시간안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매우 유용한 봉사활동이었다

 

5월달에는 단원대표로서 자이카와 더불어 단원교류행사를 준비해볼 생각이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유일한 봉사단체인만큼 정보교류를 통해서 더욱더 깊고 폭넓은 봉사활동의 밑바탕이 되는 행사가 될수있도록 준비해볼 생각이다

 

8월에는 대학생 봉사단이 6개월동안 스리랑카에 온다는데 이친구들이 오게되면 또 육개월이라는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갈 것 같다 개인적인 희망으로 군대에 다녀온 남자 다섯명이 와주길 기대하고 있지만 신체건강한 여자단원들도 한둘쯤 있다면 나쁘지 않을것같다

 

소주는 지금도 부지런히 오고 있다 스리랑카 부임 일년 동안 얼추 계산해본결과 EMS 요금이 3천불에 육박했다 친구, 선배, 후배들이 남자들만의 응원 방식, 특히 신홍철 만의 방식으로 라면,과자 일절없는 소주 + 오징어 택배를 지금 이 순간에도 보내주고 있으며 나는 소주에 대한 답례로 스리랑카 전통 차를 보내주고 있다 국내에 있을 때 신의와 의리로 인생의 높은 파고를 함께 넘어온 인생의 선후배와 친구들에게 현장사업을 비롯한 신홍철이 스리랑카에서 활력 넘치는 에너지를 거침없이 쏟아낼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한국에서 보내오는 응원의 소주에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지금 함께 하지 못하는 소주 한국돌아가면 반드시 꼭 함께 합시다 나지금 먹고싶은게 한두개가 아니오

 

이 소주는 단원들간의 화합이나 현지인들과의 친밀감을 높이는데 매우 유용하다 현재 스리랑카 콜롬보 식당 소주 판매가격은 355밀리 미터 한병에 1000루피 한화 약 8천원 정도에 형성되어있는데 택배로 오는 플라스틱병이 최소 650밀리미터이다 더욱이 여유있는 선배들은 1.6리터 병을 선호해주시기 때문에 집에 소주가 떨어질일이 없다 혼자있을때는 마시지 않고 주로 귀한손님이 오거나 콜롬보에 올라갈 때 챙겨서 올라가게 되는데 내 다음 올 후임에게 소주역시 인수인계해주고 떠날 심산이다

 

봉사단으로 파견된지 일년이 넘었다 일년이 지나면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지나간다는 선배단원들의 조언처럼 시간은 정말 화살처럼 빨리지나간다 한국에서 파견하기 전에 작성했던 액션플랜을 보면서 깔금하게 정리된것고 있고 이루지 못한부분도 있으며 이것을 스스로 평가를 내려보았다 아직 스리랑카에서 크게 이룬것도 없는데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아 아쉬운걸 보니 아직은 열심히 하려고하는 열의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일이면 다가오는 개학에 더욱더 치열하고 가슴벅찬 개학후를 기대하며!

 

2015.4.19. 스리랑카 암파라 89기 용접 신홍철

 


덧글

  • 대단하세요 2015/04/21 22:11 # 삭제 답글

    매번 올리신 글만 보고 갔는데 벌써 일년이 되었네요. 가르치는 거며 해비테트까지 정말 열심히 사신 것 같습니다. 악어 에피소드나 땡칠이 임신 소식도 처음 듣는 것 같네요. 개발도상국에 나와보면 정말 몸 하나 건강히 돌아가는 것만도 대단한 것 같더라구요. 8월에 학생들 올때 정말 일 잘하는 애들만 왔으면 좋겠네요. 남은 일년도 무탈하게 지내시다가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 괄목상대 2015/04/27 17:14 # 삭제 답글

    블로그 글 항상 재밌게 잘 읽고있습니다. 하고 계신 경험 자체가 생소한 경험이신지라 읽는이들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부분도 있지만 이에 더해 글쓰기 실력도 뛰어나신 것 같아요.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아참, 땡칠이를 한국으로 데려오실 계획도 있으신 것 같은데 그런 경우엔 어떤 방식을 거쳐서 이동하시게 되나요?
  • 가치노을 2015/04/27 23:25 # 삭제 답글

    저도 용접으로 갈 계획입니다. 멋찌시네요~! 항상 응원합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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